얼마 전 홍보처 한 간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말해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이 말은 관료제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독일의 사상가 막스 베버를 인용한 것이다.
관료는 수직적인 상하관계 속에서 비인격적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베버는 설명했다. 관료는 권력을 잡은 정치세력의 철학을 실천하는 영혼 없는 집행인이라는 취지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보호와 복종의 계약관계로 정의한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국가를 '인공적 인간'으로, 국가의 통치행위는 '인공적 영혼'으로 비유했다. 몸에 생명을 불어넣고,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통치의 기능이라는 얘기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국민의 주권을 위임 받은 정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고, 자격도 상실한 것이다.
■ 태안에서 드러난 구호행정 마비
태안 기름유출 피해 보상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배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절망만 남아 있는 삶을 이기지 못해 농약을 마시고, 시너를 뿌려 자살하는 주민이 속출하고 있지만, 쥐꼬리 만한 지원금조차 공무원 손에서 맴돌고 있다.
사고 발생 50일이 지났는데도 정부가 지원한 558억원의 생계비는 한 달 이상을 충남도에서 잠자다가 지난 21일에야 6개 시ㆍ군으로 전달됐지만, 여전히 지급되지 않고 있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배분방식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자칫 설날 전까지도 지급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정말로 피해 주민에 대한 배신이자, 칼바람을 맞아가며 복구를 거든 70만 명의 자원봉사자와 십시일반으로 158억원의 성금을 모아 보낸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이번 사태는 재난에 빠진 국민을 보호하는 가장 기초적인 구호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행정의 총체적 난맥상을 생생히 드러냈다.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은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정부 기능이기에 더 충격적이다.
비슷한 재난이 다른 곳에서 터진다 해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모아준 성금조차 신속히 피해주민에게 나눠주지 못하는 정부를 과연 정부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각종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매뉴얼을 체계적으로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시스템 정부의 실체가 이런 것이라니 어이가 없다.
피해보상비도 아닌 생계비 지급조차 이렇게 늦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급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공무원의 보신주의 탓이다.
정부나 충남도가 생계비 지급 지침 없이 돈만 내려 보내 차후에 발생하는 문제는 시ㆍ군이 떠안아야 한다는 게 해당 공무원들의 볼멘 소리다.
피해 집계에 시간이 걸린다면 일단 최소한의 비용이라도 선지급하고 후정산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추후 책임소재 문제를 걱정한다면 정부나 단체장이 대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 풀릴 수 있는 일이다.
■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풍토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최근 공무원들이 시대에 걸림돌이 될 정도의 위험 수위에 와 있다는 질책성 발언을 했다. 공무원들이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길목을 막거나 정부조직 개편에 반대 로비를 하는 행태를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국가의 기본적 기능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민원부서나 복지 부서 같은 곳이 찬밥 대우를 받는 공무원 사회의 풍토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새 정부가 정말 국민을 섬기는 정권이 되려면 이러한 풍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공무원을 걸림돌이라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국가의 기본 업무에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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