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 지음 창비 발행ㆍ271쪽ㆍ9,800원
가열한 관능의 미학, 집요한 리얼리티의 추구로 2000년대 한국 문단에서 가장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소설가 천운영(37)씨가 세 번째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을 냈다. 그녀의>
작가의 특장(特長)인 꼼꼼한 취재로 뒷받침된 소극(笑劇) ‘백조의 호수’(2004)와, 장편 <잘 가라, 서커스> (2005) 출간 이후 발표한 단편 7편을 묶었다. 잘>
낯선 감각과 욕망을 단편소설의 정격(正格)에 녹인다는 평가를 받아온 천씨는 이번 창작집의 작품 여럿에서 흥미로운 파격을 시도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노래하는 꽃마차’다. 엄마의 학대, 오빠의 강간, 갖은 성폭력의 상처를 간직한 여자가 중심인물인 이 단편은 12개의 짧은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홀수 장은 여자의 남편(혹은 연인)이 1인칭 화자로 나서고, 짝수 장은 여자, 엄마, 오빠 등 여러 1, 3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그 자체론 드문 시도가 아닌) 다성(多聲)의 화자는 이채롭게 세공된 문장을 만나 매우 독특한 형식을 완성한다. 짝수 장에서 작가는 연결 및 종결어미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문장에 흡인력 있는 리듬감을 부여한다.
음악을 닮은 문장들이 여자의 몸에 새겨진 폭력의 역사를 좇아갈 때 소설은 그대로 하나의 레퀴엠이 된다. 해마다 봄이 되면 제 몸을 찢어 ‘붉은 꽃’을 피우는 여자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하나의 단편 안에 3편의 장편(掌篇)과 ‘작가 후기’까지 들어선, 그래서 단편=소설집인 ‘내가 쓴 것’은 앙증맞은 형식과 더불어 작가의 소설론이 엿보이는 ‘메타 소설’이란 점이 눈길을 끈다.
“소설은 똥이야. …한 세계를 제 몸에 받아들여 소화시킨 다음 다시 세상에 내놓는 것. 내 안에 든 걸 그대로 토해내는 건 소설이 아니야. 절대로. 알겠니?”(163쪽) “한 권의 소설책을 낼 때마다, 내 소설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은 결코 포즈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함부로 훔쳐온 삶과 삶의 주인들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90쪽)
천씨는 “소설집을 묶고 나면 그간의 내 소설적 관심사가 무엇이었나 뚜렷이 감지된다”고 말했다. 첫 소설집 <바늘> (2001)에서 그것은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이었고, <명랑> (2004)에선 삶과 죽음이었다. 이번 책에선 상처였다고 그는 말했다. “인간은 내외의 공격에서 늘 상처를 입는다. 명랑> 바늘>
상처를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혹은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에 대한 탐색이 이번 작품집의 주제다.” 표제작은 상처에 눈물 대신 오줌(싸기)로 대응하는 여자 ‘나’의 이야기다.
출생 직후 비극적으로 죽은 남동생의 혼과 함께 살아가는 ‘나’는 눈물을 “유약한 인간들만이 …빠져 허우적거리는”(57쪽) 감정의 늪이라 여기지만, 신변의 변화를 겪으며 차츰 눈물(을 흘리는 자)에 호감을 갖게 된다.
<명랑> 에 실린 작가의 자전적 단편 ‘모퉁이’의 후일담으로도 읽힌다. 천씨가 차기 소설집의 주제가 되리라 예감하는 선악의 관계 탐구는 이번 책의 단편 ‘후에’에서 그 단초를 볼 수 있다. 명랑>
늘 세 쪽에 걸쳐 빼곡히 안부를 전했던, 그래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천씨의 ‘작가의 말’이 이번엔 “아무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겠다”며 짤막하다.
이유를 묻자 천씨는 “재작년 소설을 거의 못쓴 채 꼬박 1년을 보냈다”며 “지독히 헤매다 다시 쓸 준비가 됐다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녀가 발산하는 팽팽한 에너지엔 과연 슬럼프의 그늘 따윈 엿보이지 않았다. 천씨는 요즘 게이에 관한 장편을 진행 중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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