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뀔 때마다 과학교육을 개악(改惡)하더니 아예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2012학년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 과목을 현행 최대 8과목에서 4, 5개 과목으로 줄이기로 하자 과학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자연계의 경우 언어(국어) 외국어(영어) 수리(수학)를 제외하면 과목 축소의 불똥이 과학 과목으로 튈게 뻔하고, 그렇게 될 경우 과학 교육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울대 등 최상위권 대학의 자연계열에 진학하려면 수능 과학탐구영역 과목인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각각 ⅠㆍⅡ) 8과목 중 4과목에 반드시 응시해야 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입시정책에 따르면 2012학년도 입시부터는 최대 2과목만 치러도 대학 응시가 가능해진다. 선택에 따라서는 ‘수능 물리ㆍ화학 시험을 치르지 않은 이공대생’이 나올 수도 있다.
인수위는 “과학이나 사회의 일부 과목들은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학교 내신 시험을 통해 공부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 학장은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는 과목을 학생들이 과연 제대로 공부할 지 의문”이라며 “이는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학교육 입지 갈수록 줄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학 한국’‘이공계가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정작 과학 교육 분야는 항상 ‘동네북’신세나 다름 없었다.
제5차 교육과정까지만 해도 인문계ㆍ자연계 학생 모두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4과목을 배웠다. 그러다 제6차 과정(1999년도 대입), 제7차 과정(2005학년도 대입)으로 넘어 가면서 과학 교과의 학습량이 계속 줄었다.
특히 제7차 과정에서는 자연계열 학생이 고3이 돼서야 물리Ⅱ 화학Ⅱ 생물Ⅱ 지구과학Ⅱ 중 한두 과목만 선택해도 일부 최상위권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 진학이 가능하게 됐다. 해당 과목을 선택하지 않아 ‘전향력’이나 ‘포물선 운동’을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고 말하는 이공대 신입생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 서울대 정시 구술면접 시험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한 교수는 “원소 기호처럼 기초지식을 묻는 말에도 쩔쩔 매는 학생들이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과학 과목의 비중을 줄인다는 것은 잘못된 정책 방향”이라고 말했다.
교육을 정치 논리로 풀려니 문제
이공계 학자들과 과학 분야 인사들은 “말로만 과학기술이 중요하다고 떠들어 놓고, 정작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며 인수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현장과학교육학회 회장인 김채옥 한양대 교수는 “사교육비 문제를 수능 과목 몇 개 줄여서 해결하겠다는 발상이 참으로 놀랍다”며 “교육 문제를 정치적 논리로 풀려고 하니 이런 대책이 나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기초가 부실해지면서 부실한 전공교육을 낳고, 이것이 이공계의 미래를 흐린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원근 충북대 과학교육학부 교수는 “기업들은 ‘대학에서 뭘 가르쳤냐’고 볼멘 소리를 하는데, 대학은 학생에게 중고교 시절에 배웠어야 할 기초 지식부터 가르치는데 매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이공계생의 질 저하가 스스로의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악순환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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