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미국 카터 행정부 때의 얘기 한 토막. 백악관의 요청으로 민간항공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개혁에 나선 콘월대의 알프레드 칸 교수는 취임 첫 날부터 깜짝 놀랐다.
법무담당 직원이 들고 온 주요 법령집을 몇 번씩 읽어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기 어려웠다. 문장과 용어가 난삽한 것은 둘째 치고, 어떤 행위를 금지한다는 것인지 허용한다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다. 그의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문서를 작성한 다음에 반드시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읽어줘라. 그들이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웃음을 터뜨리면 다시 문서를 작성하라."
▦ 누가 봐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평이한 문서가 아니면 거부하겠다는 칸의 방침이 알려지자 시민들의 지지가 쏟아졌고, 민간 항공기의 항로와 운임을 결정ㆍ규제하는 이 연방기관의 모호한 규정은 단순명료하게 재정비됐다.
'A항공사가 B지역과 C지역 사이를 운항하는 것을 금한다'고 하면 될 것을, 'A항공사가 B지역과 C지역 사이에 지속적인 항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공익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는 습관은 몇 년 안돼 다시 되살아났다. 정부나 공직자들의 언어는 생래적으로 방어적이고 책임회피적이라는 얘기다.
▦ 재작년 12월 워싱턴포스트가 '미국에도 아직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제목의 글에서 'hungry'라는 단어를 쓰자 농무성이 과학적 어휘가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사람마다 배고픔을 느끼는 정도가 다른 만큼 'very low food security'라고 쓰는 게 맞다는 것이다. 농무성이 굳이 이런 주장을 내놓은 이유는 뻔하다.
말을 복잡하게 하고 알아듣기 힘들게 만들어 빈곤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덜어보려는 것이다. 민감한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동원하는 이런 식의 표현은 의외로 주변에 많다. 이른바 'bureau-speak(행정용어)'다.
▦ 최근 'R의 공포가 세계를 엄습하고 있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돈다. 여기서 R은 경기침체(recession)를 의미한다. 세계 경제가 둔화(slowdown) 단계를 넘어 침체 국면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다.
그런데 이런 어휘도 행정용어의 냄새가 짙다. 과거 종종 등장한 불황(depression)이나 위기ㆍ공황(crisis) 등이 풍기는 민감한 부분을 거세한 느낌이 들어서다.
용어의 순화를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자칫 냉철한 현실인식이 흐려질까 걱정된다. 쇼크와 패닉에 빠진 세계 금융시장도 오랜 호황에 젖은 관성과 잘못된 언어 최면의 산물이 아닌지.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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