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2> 텍사스州 댈러스-로즈데일의 루미나리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2> 텍사스州 댈러스-로즈데일의 루미나리에

입력
2008.01.23 14:53
0 0

줄리 리디씨는 변호사였고 그녀의 남편 프랭크 리디 씨는 건축가였다. 2001년 12월13일 저녁 시간을 나는 댈러스시 로즈데일 구역에 있는 이들 부부 집에서 보냈다.

댈러스를 처음 방문한 한국인 기자에게 리디씨 부부가 홈 호스피탤리티를 베푼 덕이다. 보스턴의 외과의사 피츠제럴드씨 부부 집에서처럼, 댈러스의 리디씨 부부 집에서도 나는 선량한 미국 중산층의 삶을 흘긋 엿보았다.

한국으로 치면 ‘저택’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집이 널찍했고,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그럽고 쾌활했다. 그들의 태도에선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보스턴의 피츠제럴드 박사 댁에서보다 댈러스의 리디씨 댁에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이가 없는 피츠제럴드 박사 댁에선 부부와 그들의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데 비해, 리디씨 댁에선 다양한 나이의 그들 가족 친척 틈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집을 가정(家庭)으로 만드는 것은 어린아이와 노인들이다, 라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게다가 프랭크 리디씨는 회사 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하룻저녁의 가족 친척 모임에 낯선 한국인의 자리를 마련해준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 텍사스, 가장 역동적인 역사를 자랑하는 州

텍사스 땅 대부분이 그랬듯, 댈러스에도 16세기 이래 스페인, 프랑스, 멕시코, 텍사스공화국, 미국남부연방, 미합중국의 국기들이 번갈아 휘날렸다. 프랭크 리디씨는 그 얘기를 한 뒤 텍사스가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역사를 지닌 주(州)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내 앞에서 티끌만큼도 젠체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야구팀 레인저스나 프로농구팀 매버릭스나 프로(미식)축구팀 카우보이스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이 댈러스 사람이고 텍사스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말투에서 읽혔다. 그는 2층의 한 방으로 나를 데려가 옛 카우보이들이 입던 옷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랭크 리디씨가 조지 부시 주니어의 지지자인지 비판자인지는 모르겠다. 그도 나도, 레인저스 구단주와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카우보이 스타일의 현직 대통령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텍사스와 댈러스에 대해 나를 ‘교양’하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시 생각을 했고, 부시 부자(父子)의 석유사업을 생각했다. 댈러스를 오늘날의 댈러스로 만든 원동력 하나가 석유사업 아닌가. 적잖은 사람들이 의심하듯, 부시의 전쟁 취향은 젊은 시절 이래 그의 삶을 이끌어온 석유 감수성과 무관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디씨 댁에서 부시의 석유사업을 생각하며 내가 잇대어 떠올린 것은 부시의 전쟁이 아니라 1980년대 미국 드라마 <댈러스> 였다. 그게 바로 댈러스의 석유사업가 집안 얘기였으니. 최근 몇 해 사이에 미국 드라마들이 한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면서 ‘미드’라는 말까지 생겨났지만, 한국인들이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기 시작한 게 근년의 일은 아니다.

케이블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어서 요즘처럼 여러 경로로 다양한 드라마들이 소개되진 않았지만, 미국 드라마는 한국에 텔레비전 수상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한국인들의 취향에 깊이 간섭했다.

1960년대 초등학생 시절에 본 <우주가족> 이나 <보난자> 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지금도 뇌리에 또렷하다. 탐욕과 사랑과 배신 등 대중적 소구(訴求) 요소를 두루 갖춘 <댈러스> 도 한국인들이 깊이 사랑한 미국 드라마에 속할 것이다.

나는 왜 프랭크 리디씨에게 ‘동향인’ 조지 부시를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았을까? 그가 부시를 좋아한다고 말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에 대해 내가 지니게 된 좋은 느낌이 훼손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한 달 동안 미국을 돌아다니며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 대부분에게서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의례적인 감사 편지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와서는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흔해 터진 전자우편조차 쓰지 않았다. 게으름과 스스럼이 겹쳐 하루하루 미루다가 시기를 놓쳐 그리 돼 버린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미국에서의 한 달을 되돌아 헤아리다 보니 그들 가운데 몇 사람에겐 죄의식에 가까운 미안함을 느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프랭크 리디씨다. 비록 단 한 번 저녁나절의 만남이었을 뿐이지만, 그렇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그 뒤 6년이 지나도록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니. 이 글을 쓰고 나면 이들 부부에게, 그리고 도움을 받았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뒤늦은 인사 편지를 써야겠다. 전자우편이 아니라 격식을 갖춘 구식 편지를.

■ 하이테크 기업 중심지…식도락 즐거움도

내 짐작에, 로즈데일은 댈러스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주택가가 아닌가 싶다. 숙소인 코머스 거리의 매그놀??호텔에서 승용차로 40분 가까이 걸렸는데, 중간에 주택가를 여럿 거쳤지만 루미나리에가 밤을 밝히고 있는 구역은 로즈데일 인근뿐이었다.

로즈데일은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서울시의 세수가 남아 돌아가는지, 몇 해 전부터 서울시청 광장이나 청계천 입구의 겨울밤도 어김없이 루미나리에가 밝히고 있다.

세밑 앞뒤로 적어도 두 달은 그 빛의 허영놀이를 벌이는 듯하다. 이런 조명건축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2001년의 내 눈에 겨울밤의 댈러스는 유달리 사치스러운 도시로 보였다.

1841년, 테네시주 출신의 한 변호사가 트리니티강 둑을 증기선 사업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열정을 원기소 삼아 그 인근은 이내 철도 교통의 요지가 됐고, 오늘날 석유사업, 원거리통신, 컴퓨터산업, 금융업이 만개한 댈러스로 자라났다.

미국 하이테크 기업의 1/3 가량이 댈러스에 본사나 지사를 두고 있다. 이 도시가 ‘실리콘 프레리’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그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중심지답게 마천루도 많다.

내가 머물렀던 29층짜리 매그놀리아 호텔은 1920년대에 세워졌다는데, 높이가 150m에 이르렀다. 280m가 넘는다는 72층짜리 뱅크 오브 아메리카 플라자를 비롯해서 200m가 넘는 마천루도 열 개 가까이 된다.

댈러스는 또 식도락의 도시이기도 하다. 마천루의 수에서 댈러스는 뉴욕에 한참 뒤지지만, 시민 일인당 레스토랑 수에서는 뉴욕을 앞선다. 음식도 세계 각지의 희귀 요리에서부터 그 유명한 텍사스바비큐를 거쳐 텍스-멕스(멕시코 요리의 영향을 받은 미국 남서부 음식)까지 가지가지다.

내가 진짜 인도 음식을 처음 맛본 것도 댈러스에서였다. 북텍사스 인도 협회의 회장 프라삿 토타크와씨가 한 인도식당으로 나를 초대한 덕이다.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인도 음식이 내 입에 썩 맞지는 않았다. 밥은 푸석푸석했고, 카레 향도 비위에 거슬렸다.

■ 상대적으로 힘겨운 삶 사는 동포들 ‘애잔’

다른 도시에서처럼, 댈러스에서도 언론사를 여럿 둘러보았다. ABC방송의 자회사인 WFAA와 지방 라디오 방송국들, 그리고 <댈러스 모닝 뉴스> 를 포함한 신문사들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일보 댈러스 지사를 비롯해 그 지역 한인신문사 방문도 내 프로그램에 끼워주었다.

객지에서 동포를 보는 것은 즐거웠으나, 그들의 미국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듯해 마음 한켠이 어두웠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주류 미국인들을 만나고 나서 바로 뒤에 왠지 삶이 힘겨워 보이는 동포들을 대하니 그 대비가 더욱 선명했다.

세계시민이라는 허위의식은 내가 젊어서부터 헤프게 누려오던 관념의 사치였으나, 나라 바깥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인이라는 자의식을 말끔히 씻어낼 도리가 없다. 그들이 어느 나라 국적을 지녔든, 내 정서의 결은 여느 외국인의 희로애락보다 동포의 희로애락에 더 깊이 감응한다. 나는 아직, 내가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민족주의의 포로다.

댈러스 일정이 3박4일에 그친 것은 다행이었다. 매그놀리아 호텔의 난방기 소리가 너무 커서 밤에 잠을 잘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난방기를 끄고 자기엔 날씨가 너무 찼다.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해 댈러스에서는 늘 반(半)졸음 상태로 사람들을 만났다. 프로그램을 짠 이가 그런 사정을 알았을 리는 없지만, 댈러스의 셋째 날 프로그램은 하루 종일 ‘시내 관광’을 하는 것이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엘름가의 케네디 피살현장과 케네디 기념관, 기다란 뿔의 소(牛) 동상이 늘어서 있는 파이어니어공원(댈러스는 과연 ‘목우의 주’ 텍사스의 도시였다), 농민시장, 화이트 록 연못 같은 곳들을 여유있게 살필 수 있었다.

댈러스에서는 외국인방문자센터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프라이스 헬럼스 여사가 운전기사 노릇을 해주셨다. 이미 그 때도 일흔에 가까운 할머니셨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는 헬럼스 여사는 끊임없는 수다로 내 졸음을 쫓았다. 그 땐 그 수다가 더러 성가셨으나, 문득 그 분이 보고 싶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