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숨은 돌렸다. 하지만…'
22일(현지시간) 미국이 0.75%포인트의 전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한 이후 24시간 동안 전세계 증시의 반응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투매양상을 보이던 각국 투자자들의 혼란에는 일단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반등한 나라도 찾기 어렵다. 당장 응급주사(금리인하)에 반색하기 보다 응급처치 이후의 치료과정(경기 호전)을 주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양날의 검
금리정책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칼이 아니다. 제대로 휘두르면 시장의 걱정을 단칼에 벨 수도 있지만 자칫 스스로의 몸통까지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
이번에 미 금융당국은 금리인하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인플레이션 우려는 아예 제쳐놨다. '경기부양이 먼저'라고 대놓고 선언한 셈이다. 그만큼 사태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물론 0.75%포인트 인하에 대해선 "조금 더!"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전격적인 조기금리인하는 일단 평가하는 분위기다.
얽히고 설킨 신용경색 위기를 일거에 해결하긴 어렵지만 당장 어려움에 처한 금융기관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경기둔화 강도를 완화시키는 한편, 안전자산으로의 지나친 쏠림을 되돌리는 최소한의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심리는 더욱 불안해질 수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관리라는 본업을 제쳐두고 경기부양에 나설 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금리인하를 환영하면서도 장래를 불안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장은 확실히 이중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금리인하에도 불구, 경기침체 우려는 여전하다"며 "FRB의 긴급 처방은 최근 경제상황을 바라보는 FRB 스스로가 패닉에 빠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미국의 금리 인하는 신음하는 환자의 심장에 아드레날린을 주사한 것으로 그만큼 스스로 심각한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다음 조치
이왕 공격적으로 나선 바에야 당장 이달 말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다시 한번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높다.
여기에 미국 행정부도 감세정책과 별도의 재정정책을 병행해야 잔뜩 움츠린 투자심리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당장 최근 위기설이 나돌고 있는 채권보증업체를 대신해 정부가 보증에 나서는 방안까지 거론될 정도다.
통화정책을 통한 각국의 공조 움직임도 가시화하고 있다. 홍콩과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환율을 달러와 연동시킨 '페그제' 실시 국가들은 인플레 압력에도 불구, 미국에 이어 곧바로 금리를 인하했다.
캐나다 중앙은행도 기준금리를 0.25%p 인하, 4%로 조정했고 중동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달러 페그제를 포기한 쿠웨이트마저도 23일 금리인하에 동참했다.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일본과 인도, 유럽연합 역시 조만간 금리인하 대열에 동참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단기적으론 조만간 발표될 경제지표들이 변수다. 미국의 4분기 국내총생산(GDP)결과와 고용동향, 24일 발표될 중국의 GDPㆍ물가지표 등에 따라 증시향방이 좌우될 전망이다.
굿모닝신한증권 김중현 연구원은 "파격적인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각국 증시의 반응이 미지근한 것은 사태를 되돌리기에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실망감과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하다"며 "일단 패닉은 멈췄지만 시장은 여전히 시계 제로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버냉키의 고민은 시작 "악순환의 고리 어떻게 끊나"
버냉키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의 유령을 깨운 것인가. 시장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폭적인 금리 인하 카드를 던졌지만,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고민은 오히려 지금부터 일 듯 싶다. 이젠 거대한 인플레의 압력이 그를 옥죄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이날 "버냉키는 미국경기 둔화가 물가ㆍ임금상승 압박을 줄일 것으로 예상하고, 금리 인하를 단행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버냉키의 의도대로 이번 금리인하가 경기침체와 증시폭락을 진정시키고, 또 현 경기둔화 기조가 물가압박을 어느 정도 막아준다면 말 그대로 최상의 결과가 된다.
하지만 버냉키의 희망대로 갈 지는 미지수다. 뉴스위크는"금리인하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약 2년 후에나 나타난다"며 "이번 버냉키의 도박이 성공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리 호스킨 전 클리블랜드 연방은행 총재의 말을 인용, FRB가 기준 금리를 내릴 것은 너무 때 이른 것 같다고 지적하면서 FRB가 이같은 조치를 내릴만한 상황이 악화된 새로운 경제지표는 없다고 보도했다.
호스킨 전 총재는 "FRB가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면서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FRB가 정치적 이벤트에 대해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아 독립성이 우려된다"고까지 지적했다.
시장은 일단 이날 금리인하에 환영을 표시하면서도, 0.75%포인트 정도의 금리인하로는 역부족이란 메시지를 보냈다. 추가금리인하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중국발 인플레 확산과 고유가로 인한 미국의 인플레압력은 점점 더 커지는 양상이다.
자칫 시장도 놓치고 물가도 놓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1970년대 FRB가 인플레이션 조정기능을 놓쳤던 시기, 79년 물가는 13.3%나 올랐고 미국과 세계경제는 암흑기를 견뎌야 했다.
뉴스위크는 이 같은 두자리 수 인플레이션을 2차 세계대전 이후 FRB의 가장 큰 실수로 꼽으며, 이번 조치를 '버냉키의 도박'으로 표현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정부 '펀드 런' 막기 주력
주식시장 붕괴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은 ▦연기금 증시투입 ▦환매사태시 유동성 공급으로 집약된다. 나라밖에 원인이 있는 터라 국내적으로 대응할 여지는 크지 않지만, 어쨌든 최악의 '펀드 런'(펀드환매사태)을 막기 위해 시장심리라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는 23일 한국은행 금융감독위원회와 대책을 논의한데 이어, 24일에도 '관치' 시비를 무릅쓰면서까지 국민연금 등 주요 연기금 관계자를 불러 올해 계획된 주식투자 자금을 조기 집행할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환매'사태다. 한 관계자는 "지난해 지수 1,700대 돌파이후 국내 주식형 펀드로 몰린 자금 중 당장 환매 가능성이 있는 20조원 규모의 거치식 펀드의 향방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올해 주식시장에 배정한 투자자금이 9조원 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여타 연기금 투자까지 가세할 경우 어느 정도 시장안정여력을 갖췄다는 것이 재경부의 생각이다.
국민연금관계자도 "정부 차원의 연기금 조기집행 방침과 상관없이 올 1월 현재 국내 주가가 작년 말 대비 15% 가량 빠졌기 때문에 주식비중을 높이려는 국민연금기금 자체 계획에 따라 주식시장의 상황 변화에 맞춰 여유 기금을 적극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만에 하나 펀드환매 움직임이 일어나더라도, 자산운용사 채권부분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자금 공급을 원활히 하는 단계적 대책도 마련했다.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정책수단이 총동원된 셈이다.
임승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올 상반기를 고비로 진정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며 "그때까지 불안심리로 인해 국내 금융시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기대응체제를 가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대 관심은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여부다. 미국의 전격적 금리인하에 대한 동조차원에서라도, 또 벌어진 내외금리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한국은행이 콜금리인하에 나서야 한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높아지고 있는 인플레압력이 여전히 부담스럽고, 국내금리인하가 주식시장안정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 분위기다.
한은도 일단 금리인하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이승일 한은부총재도 이날 "물가안정에 중심을 두되 금리는 시장상황을 감안해 유연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증시불안이 지속된다면, 내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인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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