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3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톱이 몽그라지고 쪼글쪼글한 노인의 두 손이 쌀을 한 움큼 쥔 사진을 표지로 한 잡지가 선을 보인다. “좀 엉뚱해 보이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뜻이 넓을수록 훌륭한 이름으로들 치는 터에, 굳이 대수롭지 않은 ‘나무’를 더구나 뜻을 더 좁힌 ‘뿌리 깊은 나무’를 이 잡지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라는 창간사로 시작하는 ‘뿌리깊은 나무’가 그 책이다.
한글전용, 가로쓰기, 크고 얇은 판형, 무거운 의미를 담은 표지사진 등 당시 잡지계의 모든 금기를 깨뜨리고 탄생한 이 잡지는 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한국교양잡지의 전범으로 자리잡는다.
‘뿌리 깊은 나무’와 이를 계승, 84년부터 발행됐던 여성교양지인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 한창기(1936~1997)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글이 한 자리에 모였다. <특집 ! 한창기> (창비)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가 농반진반 ‘일남일녀’라 부르던 두 잡지의 편집장과 편집위원, 기자, 필자로 참여했던 이들, 혹은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유난한 문화사랑정신과 소통하면서 너무 일찍 떠난 그를 아쉬워하는 59명의 글과 사진 모음집이다. 특집>
잡지 형태의 이 책은 지난해 9월 한창기의 10주기를 맞아 고인의 글을 3권으로 묶은 에세이집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 <샘이 깊은 물의 생각> , <배움나무의 생각> (휴머니스트)의 출간에 이어 20세기 후반의 비범한 문화기획자였던 그의 체취를 추체험할 수 있게 한다. 배움나무의> 샘이> 뿌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한창기는 법조인의 길을 걷는 대신 브리태니커 한국지사를 세운 경영인으로 이름을 알린 뒤 이를 토대로 교양잡지를 펴냈다. 판소리와 민요전집을 제작했고, 이름없는 민중들의 일생을 구술한 민중자서전 시리즈를 만들었으며 한지, 쪽물, 옹기의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심상치 않은 이력 만큼이나 그에 대한 기억도 백인백색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 윤구병이 들려주는 창간 에피소드부터 흥미롭다. 한창기의 수완 덕택에 70년대 중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브리태니커 독자가 늘어났는데, 한창기가 “브리태니커에 한국에 관한 항목이 적어 한국 사람들 불만이 많다. 불매운동까지 벌어질 기미다. 하루빨리 한국 문화를 제대로 담은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며 브리태니커 본사를 협박하고 꼬드겨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샘이 깊은 물’의 사진편집위원으로 고인과 인연을 맺은 강운구는 ‘위대한 좀팽이’로서 한창기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막 나온 잡지를 훑어보다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0.2~0,3mm쯤 더 떨어져 있는 마침표를 발견하고는 노발대발한 적도 있었다”며 “구석구석 꼼꼼하게 뜯어보는 분석, 아름답거나 추함을 넘어서 이미지가 풍기는 느낌 같은 것을 파악하는 주관이 확실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샘이 깊은 물’의 주요 필자였던 강준만은 한창기를 70년대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박정희의 ‘우리 것 사랑하기’의 방식대신 아래로부터 위로 다가가는 식으로 접근한 기품 있는 지식인으로 기억한다. “한국사회에 기품 있는 사람도 많았고 비판정신이 강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이를 찾기 어려웠다. 그는 ‘기품 있는 비판정신’을 대변한 이였다”
이밖에도 유달리 판소리를 사랑했던 고인에게 심청가중 한 대목을 불러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전 문화부장관 김명곤, 글을 써내면 여러 기자들과 독회를 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짚어주던 집요한 문장가로서 그를 기억하는 소설가 윤후명의 글 등은 고인이 한국 문화계에 드리운 정신적 유산이 뿌리깊은 나무의 그늘처럼 깊고 넓음을 실감케 해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