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등 / 휴머니스트현재의 필요를 위해서 만들어낸 과거의 기억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1901년 1월 22일 82세로 사망했다. 64년 간의 그의 재위(1837~1901) 시기를 가리키는 ‘빅토리아 시대’라는 용어에는 낙관의 빛이 어려 있다. 영국은 이 시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 원칙 아래 아래 양당제 의회정치를 확립했고, 참정권 확대 및 의무교육과 노동조합을 법제화됐으며, 산업혁명에 기반한 자본주의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영국의 이미지 혹은 영국적 전통의 대부분은 그때 완성됐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혹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91)이 쓰고 엮은 <만들어진 전통> 은 빅토리아 시대를 ‘전통의 발명’이라는 측면에서 해부의 대상으로 삼는다. 만들어진>
여왕이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의 의회 개원에 참석하는 모습 등 장대한 영국 왕실의 의례는 매스컴에서 흔히 말하듯 ‘천년의 전통’일까? 사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으로 알려진 퀼트의 기원은 실은 18세기 초 영국이 스코틀랜드를 통합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입힌 작업복이라는 것이다.
홉스봄과 공저자들은 군주정의 존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빅토리아 여왕 즉위 50주년(1887), 60주년(1897) 기념행사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의례와 국경일, 영웅,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전통의 발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 그것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ㆍ통제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영국을 필두로 당시의 신생국들이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 국민국가의 통합 및 그 권위ㆍ특권의 지속이라는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공식 기억’으로서의 전통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입증한다. 민족조차 ‘상상의 공동체’로 불리며 탈민족 담론이 힘을 쓰는 지금에 보면 이미 고전이지만, 역사 혹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시 갖게 하는 책이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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