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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진보주의를 진보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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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진보주의를 진보시켜라

입력
2008.01.2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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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이 우리 정치에 미친 영향은 자못 심대한 듯하다. 승리한 한나라당은 우리 사회의 전면적인 개조를 추진하는 반면,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변신을 위한 암중모색을 거듭하고 있다. 와중에 나타난 것이 진보를 둘러싼 논란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는 '새로운 진보' '유능한 진보'를 제시하고, 민주노동당 심상정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진보의 재구성'을 천명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한 유시민 의원은 '유연한 진보'를 강조하고 있다. 중도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을 포괄하는 이른바 범(汎)진보 세력은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처했지만, 진보라는 말은 아연 활기를 띠고 있는 상황이다.

■ 콘텐츠 갖춰야 할 범진보세력

범진보 세력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단기적으로 대선의 패배에 있다. 국민 다수는 중도개혁 또는 진보개혁 노선이 아니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제시한 '경제 살리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좀 길게 보면 범진보 세력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잇단 보궐선거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음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을 등한시해 왔기 때문이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범진보 세력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 수식어가 '새로운' '유능한' '재구성' '유연한' 등을 포함해 그 무엇이든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진보냐의 현학적 언설에 있는 게 아니라 국민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실제적인 공감대에 있다. 진보의 새로운 혁신을 위해 나는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레토릭을 넘어선 콘텐츠'다. 미래에의 전망은 거시적인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동시에 미시적인 콘텐츠를 갖춰야 한다. 콘텐츠가 부족할 때 레토릭에 의존하게 되며, 남발되는 레토릭들은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결국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게 한다.

지난 5년을 돌아봐도 '2만 달러 시대' '동북아 시대' '동반 성장' 등 여러 레토릭이 제시돼 왔지만, 정작 그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보기 어렵다.

세계화 시대에 어느 사회이건 점차 중요해지는 것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성과 역량이며, 이는 무엇보다 최선의 해결 방안에 대한 구체적 콘텐츠의 확보를 요구한다. '레토릭의 정치'를 넘어 '콘텐츠의 정치'로 진화하는 것이야말로 진보가 갖춰야 할 일차적인 조건이다.

이와 연관해, 둘째 '담론을 넘어선 정책'이 중요하다. 일각에서 '우향우'했다고 비판 받는 손학규 대표가 최근 남긴 말 가운데 내게 인상적인 것은 '진보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간다'는 언명이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진보적 가치를 여전히 옹호한다면, 이 가치는 담론적 토론을 넘어 정책 대안 제시로 구체화돼야 된다. 세계화 시대에 시장의 효율성과 사회적 공공성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는 모든 국가의 딜레마다.

이 점에서 진보를 표방한 정치 세력은 경제성장, 양극화 해소, 사회통합, 평화체제 구축 등에서 보수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는, 효율성과 공공성을 결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 목록들을 제시해야 한다.

■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번 무너진 지지기반은 쉽게 복구되기 어렵다. 범진보 세력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임시방편보다도 지속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대안을 준비하고, 이로써 국민 다수를 설득해야 한다.

진보주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적 지지를 얻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진보주의를 새롭게 '진보'시켜야 하는 문턱 앞에 우리 사회 진보개혁 세력은 이미 서 있는 셈이다.

<저작권자>

김호기 연세대 교수ㆍ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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