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H₂O. 보통은 ‘명품 생수’라고 불리지만, 겸손하게 나를 낮출 땐 이 이름을 쓴다. ‘물’이라는 더 흔한 이름이 있긴 하나, 그건 진짜 별로다. 물에도 급수가 있는데, 휘발유보다 비싼 ‘프리미엄 워터’를 그렇게 부르면 섭섭하지. 석유를 ‘블랙 골드’(black gold)라 불렀던 것에 빗대 ‘블루 골드’(blue gold)라는 별명을 내게 붙여준 사람들도 있다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다크 블루 빛깔의 잘록한 호리병에 담긴 나는 오늘 회사원 S양의 손에 쥐어져 있다.
내 몸값은 무려 5,900원. 회의를 할 때도, 업무를 볼 때도, 그녀는 나를 들고 다니며 이따금씩 마신다. 예전엔 스타벅스의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 유행이었지만, 이젠 나처럼 화려한 생수병을 들고 다니는 게 ‘있어 보인다’나. 커피보다 내가 더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건 일상에 더 깊숙이 침윤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커피 마시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내외지만, 내 덕분에 그녀는 ‘하루 종일’ 멋져 보일 수 있다. 남들이 ‘된장녀’라고 욕해도 S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S가 내게 푹 빠진 건 미국 드라마 때문이었다. 어느날인가 <프렌즈> 의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이, <위기의 주부들> 의 가브리엘(에바 롱고리아)과 <섹스 앤 더 시티> 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가 줄곧 마셔대던 생수병에 눈길이 꽂혔다. 피지의 바다와 열대우림이 그려진 짙푸른 사각 물병에 그녀는 매료됐다. 섹스> 위기의> 프렌즈>
미국을 강타한 ‘피지 워터’와 함께 그녀의 명품 생수 순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지. 흐르는 물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해 표면이 올록볼록한 ‘티난트’, 심플한 디자인의 투명물병에 도회적인 레이블로 멋을 낸 ‘타우’, 동그란 원형 병에 파란 뚜껑으로 포인트를 준 ‘오고’,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코발트 빛의 ‘몬테스’….
지난해 뉴욕 출장에선 할리우드 스타들이 주로 먹는다는 그 유명한 ‘블링 H₂O’를 35달러에 사 마시고 물병을 챙겨왔다. 향수병 뺨치는 럭셔리한 파스텔톤 병에 촘촘이 박혀있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라니. 가끔 세균으로 가득한 이 병에 생수를 담아 마시며 기분을 내는 S는 ‘블링 H₂O’의 국내 시판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S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덕분에 요즘 나는 정말 잘 나간다. 백화점 전용매장 뿐 아니라 특급호텔과 강남의 고급 레스토랑, 고가 헬스클럽 같은 곳에도 진출했다.
연간 3,000억원의 물시장에서 나는 스타 중의 스타야. 와인 리스트가 있는 것처럼 고급 식당엔 생수만 모은 ‘워터 리스트’가 별도로 있고, 물맛을 감별해주는 ‘워터 소믈리에’라는 신종 직업도 생겨났다.
2007년 상반기엔 판매량에서 처음으로 탄산음료를 제쳐 ‘콜라제국의 붕괴’라고 난리가 났었지. 십수 년 전, 물을 사 먹는 시대가 오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조차도 웃었는데…. “이런 봉이 김선달 같으니라고!”
많은 사람들이 정말 미각만으로 나를 구별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무색ㆍ무미ㆍ무취의 나를 표현할 때도 와인에서처럼 ‘바디감’(입안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느낌)이 있다는 표현을 쓰고, 한 모금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물방울의 느낌을 ‘크리스피’(crispy)하다고 묘사한다.
오세진 워터큐코리아 사장은 “탄산수는 청량감과 톡 쏘는 느낌이 있고, 암반수는 부드러우며, 알칼리수는 가벼운 느낌이고, 미네랄워터는 묵직하면서 살짝 느끼한 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쉿! 이건 비밀인데, 식음료계의 전문가들 사이에선 뜻밖에도 ‘제주 삼다수’가 최고의 물로 꼽힌다. 정교한 입맛으로 소문난 윤석빈 크라운베이커리 상무는 “바디감이 있는 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미국 유학 시절엔 ‘폴란드 스프링’과 ‘에비앙’을 주로 먹었는데, 한국에 와선 ‘제주 삼다수’를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깨끗하고 크리스피한 물맛이 최고라는 거야.
그런데! ‘제주 삼다수’의 물값이 500㎖에 350원으로 최저 수준인 이유는 뭘까. 윤 상무는 이름과 디자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디자인이 비슷한 프랑스의 볼빅이 플라스틱 투과도 조절을 통해 쇼케이스에 진열됐을 때 반짝이면서도 예쁜 색감을 내는 반면, 삼다수는 단순한 플라스틱 병이다 보니 물의 컨셉이 드러나지 않는다”며 “너무 단순하고 솔직한 이름 때문에 좋은 물이 ‘명품 생수’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더라. 나처럼 스스로를 드러낼 특색이 없는 존재들은 포장의 힘을 빌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미 나를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다.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듯 럭셔리한 생수 병 하나쯤은 구비하고 있는 게 세련된 도시인의 상징이 됐다.
나건 홍익대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국 생수에 밀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한국적인 디자인을 풀어낼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며 “제품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독특한 디자인을 통해 한국 생수도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말이지 나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멋진 옷을 입어보고 싶다니까.
한낱 물 주제에 너무 도도하게 군다고 흘겨보시진 말았으면 좋겠다. 이제 나는 그냥 물이 아니잖아. ‘난 소중하니까요’라고 외치는 당신의 욕망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 나는 패션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 CF스타들 '물먹는' 전쟁
“나를 물로 보지 마!”
과거 여성그룹 핑클을 내세운 건강음료 ‘2%’의 CF는 파격적이었다. ‘톡 쏘는 맛’ 없는, 물에 가까운 건강 음료라는 개념도 새로웠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성 스타를 앞세워 미용 효과를 강조한 것은 물 음료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이제 물 음료 CF는 화장품 광고 못잖은 여성 톱스타들의 격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지현, 보아, 김태희, 김아중, 이효리, 성유리 등 인기와 외모를 갖춘 뛰어난 여성 톱스타들이 모두 물 음료 CF에 출연한다.
이같은 현상은 여성들에게 몸이 항시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됐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몸이 운동이나 다이어트를 할 때 뿐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늘 관리해야 할 대상이 되면서 마시는 물부터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 좋은 물 음료를 마시는 것이 몸매 관리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17茶’는 런칭 당시 가슴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전지현의 S라인을 강조한 CF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또 ‘광동 옥수수 수염차’는 보아의 얼굴을 통해 ‘V라인 미녀’를 강조했고, ‘까만콩차’는 탄력 있는 피부미인을 만드는 음료라는 제품의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김아중을 캐스팅했다.
여성과 물 음료가 불가분의 관계가 되면서 물이 곧 여성의 패션 아이템이 되는 현상도 벌어졌다. 할리우드에서는 패리스 힐튼이 ‘블링 H₂O’ 생수를 들고 다니면서 유행이 됐고, ‘에비앙’ 생수는 제니퍼 로페즈와 머라이어 캐리 등 스타들이 애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돈 안 들이고 광고 효과를 보고 있다.
할리우드의 트렌드 세터 중 한 명인 제니퍼 애니스톤은 아예 ‘글라소 스마트 워터’ 생수에 직접 투자한 뒤 한동안 이 생수병을 들고 다니면서 파파라치에게 사진을 찍혀 큰 홍보 효과를 보기도 했다.
이 음료들이 몸매 관리에 어느 정도 효과를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타가 홍보하는 물 음료를 마시는 것 자체가 자기 관리에 신경 쓰는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이 선글라스나 목걸이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특화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물을 물로 볼 게 아니다.
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j@hk.co.kr
■ 한병에 106만원 '귀족물'…"난 격이 달라!"
물이 화려하고 다양해진다. 옷이 날개라고 화려한 용기에 담으니 왠지 달라 보인다. 여기에 마치 “물을 물로 보지 마”라는 듯 다양한 기능까지 첨가되니 얕잡아볼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용도는 같다. 마시라는 거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든 피부 미용에 좋다는 이유든 아니면 옛말처럼 냉수 마시고 속 차리기 위해서든 물은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마셔야 하는 것이다.
어, 근데 이게 웬일? 흔하디 흔하다고 생각했던 물, 그래서 쉽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물의 값이 천차만별이다. 500ml를 기준으로 350원짜리가 있는가하면, 무려 100만원이 넘는 것도 있다.
입이 쩍 벌어진다. 수소 2개와 산소 1개가 모여 이뤄졌다고 화학 시간에 배웠던 그 물이 아닌가? H2O에 루트(√)라도 붙여 다른 물이 됐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가장 싼 물과 가장 비싼 물은 어떻게 다를까? 극과 극을 비교해봤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물 중 가장 비싼 것은 미국 BIO2 사가 개발한 AO2(아쿠아 옥시즌). 60ml에 무려 12만8,000원이란 금액으로 시중에 판매된다.
원래 밀폐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우주인을 위해 개발한 기능성 음료에서 출발했다. 일반 1급수의 물에는 10ppm의 산소가 들어 있지만, AO2에는 무려 10만ppm이 들어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물 60ml에 12만8,000원은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유가 있다. AO2는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 일반 물에 15방울 정도 떨어뜨려 마셔야 한다. 60ml를 한꺼번에 마시면 체내 산소 수치가 급격히 올라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3,000ppm의 산소를 함유한 산소음료수 ‘파워 런 AO2’를 개발해 조금 싼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다. AO2 한국 판매사인 BIO2코리아 관계자는 “뛰어난 산소 공급으로 운동 시 호흡 조절에 효과적이며, 머리를 맑게 해준다”며 전국마라톤협회 공식 음료라고 말했다.
가장 싼 물은 국산 ‘석수와 퓨리스’다. 대량구매하면 500ml 기준으로 300원대(20개에 6,000원)까지 저렴해진다. 여름철 얼려서 파는 수고를 더한다 하더라도 하나에 500원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싼 게 비지떡’은 아니다. 광고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세계 3대 광천지역에서 추출한 미네랄이 다량 함유된 천연광천수다.
소백산맥 지하 200미터에서 취수해 살균을 거쳐 판매되는 것으로 가격 경쟁력 좋고 깨끗하기까지 하다. 칼슘,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 등 물에 함유된 미네랄도 비싼 물 못지않다. 비슷한 가격대의 ‘스파클’ ‘삼다수’ 등에서도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물 값은 이렇게 몇백원대에서 수만, 수십만원대까지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가격 만큼이나 종류와 기능도 다양하다. 어떤 물을 마실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듯, 물의 맛과 기능도 마음에 달려있는 것 아닌지.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 산소수·수소수·광천수… 이름값 할까?
세종대왕의 눈병을 고쳤다는 초정리 광천수, 북한이 소화기 질환에 특효라고 광고하는 석왕사 샘물 등 그냥 물로 보기엔 효험있는 물이 꽤 있다. 이름 그대로 약수(藥水)다. 최근에는 수소수, 산소수 등 항산화 효과로 성인병을 예방한다는 가공수까지 등장했다. 이런 물들이 진짜 건강에 도움이 되기는 할까.
전문가들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굳이 기능성 물까지 마실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신현대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인체의 70%가 물이니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은 건강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면서 “유해균이 없어야 하고, pH 7.5 정도의 약알칼리성이며, 용존산소가 풍부한 물”을 최고로 꼽았다. 하루 권장량은 1.2리터.
깨끗하고 믿을 만한 물을 마시는 것은 좋지만 물에만 의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안윤옥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물로 섭취할 수 있는 미네랄의 양은 하루 권장량에 한참 못 미친다”면서 “미네랄은 식품으로 섭취하고, 수분 섭취는 깨끗한 정제수를 마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안 교수는 그러나 산소수, 수소수 등에 대해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유행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너무 믿지는 않는 게 좋다는 얘기다.
무거운 물통을 들고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깨끗하고 믿을 만한 물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반 소매점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용기 겉에 붙여 있는 표시사항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박석천 환경부 토양지하수과 사무관은 “지하에서 뽑아올린 일반 생수는 판매 전 유해한 물질이 들어있는지 수십 가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에 탄산이나 과일 향을 넣은 물은 기능성 음료로 분류해 식약청에서 관리한다. ‘식약청 기준에 따른 표시사항’이나 ‘허가 필증’이 붙어 있다면 믿을 만한 물이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 웰빙·다이어트… 음료시장화두는 "묽게, 더 묽게"
음료수를 고르는 사람들의 취향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고데기로 힘 준 앞머리에 ‘뽕’을 넣어 어깨를 한껏 부풀린 청재킷이 멋으로 통하던 시절, ‘음료수’라는 말은 십중팔구 콜라를 의미했다. 나머지 두셋은 사이다나 환타. 이 시절 콜라의 광고 문구도 ‘코카콜라 그것뿐(Coke is it)’이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음료수=탄산음료’라는 공식이 진리였다.
하지만, 한국의 히트 음료수는 물에 가깝게 점점 묽어졌다. 1980년대 중반 나트륨 칼륨 등을 첨가해 체액과 비슷한 농도를 띠는 이온음료가 하나둘 시장에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과일을 갈아서 만든 100% 과즙음료도 등장했다. 두 제품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음료수 시장의 불꽃 튀는 경쟁을 촉발했다. 우유나 보리를 섞은 새로운 탄산음료가 잠깐 인기를 끌었지만 이내 사라져 갔다.
1995년 생수 시판 허용은 음료수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 물이 달고 자극적인 음료수의 경쟁자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향과 맛이 있는 음료수와 시원한 청량감을 주는 생수 사이에서 번민했다. 1999년 7월, 혁명은 변증법적으로 일어났다.
맹물도 아니고 음료수도 아닌 듯한 미(微)과즙 음료 ‘2% 부족할 때’가 탄생했다. 이후 음료시장의 지배적 트렌드는 ‘묽게, 더 묽게’.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즈음부터 소주의 도수도 낮아져 갔다.
생수가 콜라 판매량을 앞선 오늘날 미과즙 음료수의 인기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차(茶)다. 긴 세월 돌고 돌아, 가장 오래된 음료 문화로 복귀한 셈이다. 여러 곡물과 차 성분을 넣어 블렌딩한 음료수와 동서양 각종 차의 깊은 맛을 되살린 음료수가 인기다. 차 음료수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웰빙과 다이어트. 마실거리도, 결국 시대의 문화적 코드를 좇아 간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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