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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간절하게 참 철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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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간절하게 참 철없이'

입력
2008.01.2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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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지음 / 창비 발행ㆍ117쪽ㆍ6,000원.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치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수제비’ 전문)

안도현(47) 시인이 4년 만에 펴낸 아홉 번째 신작시집엔 음식의 성찬이 벌어진다. 3부 59편으로 구성된 시집의 2부엔 무말랭이, 물외냉국, 닭개장, 갱죽, 태평추, 간장게장, 무밥, 민어회, 병어회, 물메기탕, 시락국, 전어속젓, 매생이국 등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들어있다. 향토색 짙은 음식들을 매개로 시인은 추억 여행을 떠난다.

눈 오는 저녁 아들과의 밥상에 올려진 갓 담근 명태선(북방식 명태무침)은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할어버지가 맛있게 자셨다는 이것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솜치마 입은 북쪽 산간지방의 여자가 되었으리라 그런 날은 오지항아리 속에 먼바다를 귀히 모신다고 생각했으리라’(‘북방’에서)는 상상을 일으킨다.

고춧가루 물로 맛을 내 타지 사람들은 낯설어하는 안동식혜.

그런데도 안동 사는 굴뚝새들은 겨울이면 ‘봉창을 부리로 두드리며 “아지매요, 올결에도 식혜 했니껴?”하고 묻’는다. 이런 밤엔 ‘목마른 항아리가 검은 머릿결이 아름다운 눈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하는 것이다’(‘안동식혜’). 시인에게 음식(에 대한 추억)은 이처럼 유려한 서정을 길어내는 깊은 우물이다.

작품마다 서사가 뚜렷한 이 시집엔 내용, 형식 모두에 작위(作爲)가 없다.

시인은 때로 시행(詩行)이나 운율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유롭게 추억담을 꺼낸다. ‘바라보는 일이 직업’인 ‘저 구름의 독거(獨居)를 사랑’(‘독거’)한다는 고백처럼 그는 물끄러미 풍경을, 추억을 응시한다. 하지만 그 시선엔 사뭇 긴장감이 서려있다.

경운기를 몰고 눈길을 달리는 노인을 시인은 ‘눈길’에서 ‘비옷 입은 노인의 번들거리는 왼팔로/ 눈송이들이 벌레처럼 다닥다닥 달라붙는 게 보였다/ 벌레들은 꿈틀거리며 노인의 목을 타고 올라가/ 눈썹을 하얗게 갉아먹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편안하게 시를 읽던 이들을 일순 긴장시키는, 섬뜩하기까지 한 낯선 시구들의 연원은 어디인가.

그것은 인간적 편견을 버리고 자연과 어깨 겯는 시인의 태도다. ‘식구들이 모두 달라붙어 키운 염소를/ 겨울에 잡았다// … // 우리 식구는/ 어미젖을 빠는 어린 염소들마냥/ 염소고리에 달라붙어 겨울을 보냈다’(‘염소 한 마리’) 우리는 어미의 자식인 동시에 뭇생명들이 거둬 키운 자식 아닌가.

하여 시인은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는 저녁에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빗소리’)하는 것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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