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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 엑스트라 출연 발각으로 집안 발칵…한겨울 밤 &#51922;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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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3> 엑스트라 출연 발각으로 집안 발칵…한겨울 밤 쫒겨나

입력
2008.01.21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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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빨리 가서 구두 닦아와!"나는 재빠르게 선배들의 구두를 모아들고 방송국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명중씨, 사람 못 들어오게 여기서 잠깐 지켜줘요. 미안!"골초 여자 탤런트들이 화장실 속에서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밖에서 "죄송합니다. 헤헤헤…화장실 수리 중입니다"라며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 나는 그녀들의 전속 파수꾼이었다.

그러나 구두를 빨리 안 닦아왔다고, 구두에 광이 안 난다고 면상에 구둣발을 날리는 선배가 있었다. 고스톱 판에 코 낀 선배의 여자 친구에게 달려가 (선배가) 방송 때문에 늦는다고 했다가 뺨이 돌아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스태프 보조로는 이제 프로급이 되었다. 연출자의 콘티와 작가 집에서 원고 잘 받아 오는 것은 내가 으뜸이었다. 그 때 등사실에서 함께 밤새고 일하던 아르바이트 동료는 후에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되었다.

A, B, C 전 스튜디오를 누비며 드라마, 쇼, 교양 프로에 매일 1인 몇 역의 엑스트라를 하였다. 한 세트에서도 수없이 옷을 바꿔 입으며 쉴 새 없이 뛰었다. 내 얼굴은 검정 칠과 수염으로 늘 범벅이었다.

대사라고는 "예" "아뢰오" "제발 목숨만 살려줘요!!" 뿐이었다. 당시 엑스트라 출연료는 1,000원이었다. 몇 역을 해도 1인 출연료만 주었다. 조연출(AD) 치고 삥땅 안 하는 사람이 없었다. 700원만 주는 AD도 있었다.

드라마 <실화극장> 의 AD P씨는 욕심을 더 내어 출연료를 아예 식권으로 주었다.(P씨는 후에 유명한 PD가 되었으나 그 삥땅 버릇 때문에 끝내 쇠고랑을 차고 판을 떠났다.) 방송국 옆 남산식당의 식권은 민짜곰탕 식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방 아줌마에게 인사를 잘해 고기와 밥이 곱빼기로 든 특곰탕으로 배불리 먹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어. 언제고 내 발에 모두들 입 맞출 날이 올 거야. '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추운 겨울 밤이었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반공드라마 <실화극장> 은 중앙정보부가 무서워 영화계의 톱스타 김승호, 이민자, 최무룡, 박노식씨 등이 꼼짝없이 출연하였다. 스크린에서만 보던 대스타들을 곁에서 볼 수 있어 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물론 나도 스타들과 함께 연기하였다. 인민군 엑스트라로. 방송을 마치고 소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남섭 PD가 최무룡, 이민자씨가 봉투를 줬다며 모든 '쫄자'들을 명동 뒷골목 돼지갈비집으로 끌고 갔다. (이남섭PD는 <실화극장> 외에도 인기드라마 <여로> 의 극작가와 연출자로도 유명했고 성품도 온화해 인기가 좋았다.

그는 KBS 1기 탤런트인 부인 김난영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얼마 안돼 곁으로 따라 갔다. 나는 훗날 그의 딸 이미경을 영화 <물망초> 에 주인공으로 데뷔시켰다.) 정말 기분이 하늘로 날아가는 날이었다.

스타들의 특별보너스로 간만에 갈비를 한없이 뜯고 막걸리를 독째 마셨으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빙판길을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신바람 나게 집으로 달려갔다. 동네 개들이 통금 사이렌과 함께 나의 귀가를 환영하였다.

나는 제왕이 된 기분으로 거대한 우리 집을 올려다보았다. '미안…미안…' 인사하고는 단숨에 집 담장을 휙 올라탔다. 그 순간 "삐꺽~"대문이 열리며 하얗게 질린 막내누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돌덩이 같이 굳었다.

무슨 변이 생겼구나…"너, 어떡해 된 거야?! 텔레비전에 나온 게 정말 너야?"이어 조카들이 뛰어나와 매달렸다. "삼촌,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봤어! 와, 삼촌!" 나는 술이 확- 깼다. 잠시 후 집안이 대낮같이 환해지며 왁자지껄한 소리가 쏟아졌다. 발각된 사연은 이렇다.

당시는 TV 수상기가 귀한 시대라 밤이면 TV 있는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연속극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엑스트라였지만 먹칠한 내 얼굴이 여러 TV프로에 자주 나오다 보니 재수 없이 눈썰미 좋은 동네 아줌마 눈에 꽂힌 것이다. "저 거, 하씨 댁 막내 아니야?!" 모두들 눈알이 커졌다.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마침내 반장인 우리 큰형수 귀에 걸렸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쳐 박혀 있는 애를…!" 큰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연속극은 백해무익하다며 뉴스만 끝나면 스위치를 꺼버리고 이부자리에 드는 큰형이었지만 형수의 계속되는 쏙닥거림에 하는 수 없이 그날 TV 앞에 전 식구들과 눈을 크게 뜨고 앉았다. 드디어 드라마가 끝나며 자막이 나오자 큰형은 큰형수에게 귀한 동생을 욕되게 했다며 이부자리로 들었다.

그 때 자막 뒤로 수염을 붙이고 포승에 묶인 죄인 한명이 "아이고! 사람 살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게 아닌가. "저게 누구야!!!" 일제히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안방 문이 '쾅' 부서지듯 열리며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큰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瑛?집에서 나가!!"우리 집 대문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나는 영원히 우리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의 운명의 길로 떠났다. 그날 밤 눈이 몹시도 많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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