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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부자들의 문화 헤게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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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부자들의 문화 헤게모니

입력
2008.01.1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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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北)은 핵폭탄! 남(南)은 세금 폭탄! 불안해서 못 살겠다!!"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입주자 대표회의 이름으로 내걸린 플래카드 문구다. 빼어난 선동이다. 핵무기와 세금의 유비는, 비록 현실을 구부러뜨리고 있긴 하지만, 뛰어난 수사학적 성취다. 리듬도 힘차다.

수사학 교과서에 예문으로 오르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그 진솔함이라니. 서울 강남의 살 만한 사람들에겐, 눈에 뵈지 않는 북핵보다 제 재산을 갉아먹는 듯한 세금이 훨씬 더 불안할 것이다.

■ 與도 野도 '부자들을 위하여'

'세금 폭탄'의 세금은, 그것이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이름으로 적시됐으니, 부동산 보유나 거래와 관련된 세금일 테다. 그렇잖아도 한나라당에 막무가내로 우호적인 서울 강남 유권자들이 지난 대선 때 앞 다투어 투표소를 찾아 이명박 후보를 꾹꾹 눌러 찍어준 것도 부동산 세제 때문일 것이다. "공시가격이 고작 6억원 남짓 하는 아파트인데 종부세라니, 원." "팔아치우려 해도 그 놈의 양도세 때문에."

서울 강남 민심이 천심이라는 걸 깨달은 게 한나라당만은 아니다. 통합신당의 새 대표가 된 손학규씨는 첫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취득세와 등록세 1% 포인트 인하 정책은 곧바로 추진돼야 하며 1가구 1주택자 양도세 완화조치도 2월 국회에서 바로 처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를 환영한다는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의 화답도 바로 이어졌다. 곧 자리를 맞바꿀 여당과 제1야당이 고가 아파트 보유자들을 위해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사실 손학규씨 주장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제 당 후보 정동영씨가 내세웠던 주장을 되풀이한 데 불과하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부자들의 환심을 못 사 안달이다. 종부세 과세 기준을 9억이나 10억으로 올리겠다는 새 정부 뜻도 곧 이뤄지리라. 출총제와 금산분리도 사라질 테고.

20세기의 한 정치철학자는 사회가 부자들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는 것은 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종의 '상식'으로 만드는 헤게모니 문화를 통해서라고 말한 적 있다. 이 문화헤게모니에 휘둘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이로운 것이 제게도 이롭다 여기게 되고, 그래서 부자들처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규범으로 만드는 이 문화헤게모니를 해체해야 좀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 철학자의 생각이었다. 지난 대선 때 우리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대표해온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부자들의 문화헤게모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부자들의 문화헤게모니는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해 보인다. 오로지 '경제'라는 구호를 선점했다는 이유로, 그것이 어떤 경제인지는 묻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부자고 서민이고 '경제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 후보가 속한 정당을 포함해 올 4월 총선에서 원내 1, 2, 3당이 되리라 예상되는 정당들의 대표는 모두 한 정당 출신, 최상층 부자들을 대표해온 정당 출신이다. 대다수 정당이, 더 나아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한 유권자 다수가 부자들의 문화헤게모니에 빨려들어갔다는 뜻이겠다.

그 문화헤게모니의 이름은 시장지상주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인들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시장은 합리성의 연산으로 작동하는 투명한 시장이 아니다. 그 시장은 여러 규모의 '패밀리'들이 온갖 연(緣)줄의 폭력으로 개인들을 억압하며 경쟁을 왜곡하는 전근대적 시장이다.

■ 투명한 연대사회로 나가려면

강력한 복지가 시장의 냉혹함을 누그러뜨리고 주체적 개인들의 합리성이 마피아적 연줄을 끊어내는 투명한 연대사회를 세우려면, 부자들의 이 문화헤게모니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가느다란 희망은 민주노동당 같은 비주류 정당 언저리에 있다. 요즘 시끌벅적한 민주노동당에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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