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4m, 폭 2m의 피스트 위, 흰 도복에 마스크를 쓴 검객 둘이 날카로운 검을 곧추세운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중세 유럽 상류사회의 필수 교양 중 하나였던 펜싱은 이른바 ‘귀족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를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성행했으며 이후 전유럽으로 인기가 확산됐다. 현재 각 종목(에페, 플뢰레, 사브르) 세계랭킹 5위까지 비유럽 선수들의 이름이 극히 드물 정도로 유럽이 강세다. 이 가운데 한국의 남현희(27ㆍ서울시청)가 당당히 여자 플뢰레 2위에 올라있다. 당연히 2008 베이징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다.
시련을 딛고 정상으로
지난 2005년 12월 남현희는 태릉선수촌 합숙훈련 도중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눈을 찌르는 속눈썹 때문이었다. 볼을 부풀리는 수술까지 받은 남현희는 대한펜싱협회로부터 ‘성형수술로 인한 훈련 소홀’이라는 이유로 2년간 국가대표 자격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후 협회의 결정에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고 결국 협회는 진상 재조사 후 자격정지 기간을 6개월로 낮췄다.
남현희는 당시를 기억하며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며 안타까웠던 심정을 털어놓았다. “다름아닌 펜싱 관계자들이 사태를 계속 부풀리는 모습을 보며 회의를 느꼈다”고 말한 남현희는 조종형 서울시청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남현희를 끝까지 다독인 이가 바로 조 감독이라고.
신발끈을 다시 묶은 남현희는 2006년 3월 상하이월드컵과 도쿄 국제그랑프리대회를 2주 연속 제패했다. 또 12월 도하아시안게임에서 플뢰레 개인, 단체전 금메달을 석권해 지난해 3월 한국 펜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랭킹 1위에 등극했다. 성형 파문의 아픔을 깨끗이 극복한 셈이다.
‘완성형 선수’ 남현희
남현희는 지난달 30일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하루 5, 6시간씩 맹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2시간 가량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경기를 펼치고 3, 4시간 동안은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집중 레슨을 받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 플뢰레 금메달리스트인 김영호 여자 플뢰레 코치는 “(남)현희는 최소한 동메달은 딸 것”이라고 자신한다. 김 코치는 남현희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 뿌듯할 정도로 훈련을 잘 소화하고 있다”며 “실력과 정신력을 두루 갖춘 만큼 이번 올림픽에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몸통만을 공격할 수 있는 플뢰레는 정확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는 것이 승리의 관건. 피스트 위에서 다소 동작이 컸던 남현희는 보다 작은 동작으로 스피드를 극대화해 타이밍을 잡는 전술을 익히고 있다. 스타일을 바꾸는 과정이 힘겨울 만도 하지만 김 코치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선수라 놀라운 속도로 적응해가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룡점정의 무대는 베이징올림픽
오는 3월말에야 베이징행 티켓의 주인이 가려지지만 세계랭킹 2위 남현희의 올림픽 출전은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남현희는 다음달 13일부터 오스트리아-독일-폴란드-러시아-헝가리-프랑스를 거치며 그랑프리 대회 2개, A급 대회 4개를 치르는 강행군을 펼친다. 강자들과 잇따라 실력을 견주어본 뒤 귀국길에 오르는 3월20일께는 올림픽 메달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날 전망이다.
남현희는 “어차피 1,2포인트에서 메달 색깔이 결정되기 때문에 결국은 정신력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시상대 맨 꼭대기를 향한 남현희의 열망은 이미 금메달 감이다. “하면 할수록 노련미도 많이 생기고 욕심도 커지는 것 같아요.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 듯한데, 온 힘을 다 쏟아서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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