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이천의 냉동물류창고 화재참사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분명한 책임소재는 물론, 발화원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어제 중간수사 결과가 나왔으나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확실한 사실을 꼽으라면 지난 해 10월 중순 이 건물의 외벽에 불이 나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진 지 사흘 만에 소방시설 완공 검사필증이 발부된 것이다.
그런데 서류심사만으로 진행된 이 절차는 별다른 하자가 없다. 과거 비리 소지와 함께 민원의 대상이 돼온 현장점검 제도를 규제개혁 차원에서 없앤 까닭이다.
■ '규제=악'의 단순함이 참사 빚어
딱 부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례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측이 종교처럼 밀어붙이는 친기업적 규제개혁과 관련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바꾸는 것 자체의 매력에 빠져 무엇을 어떻게 바꾸느냐, 즉 개혁의 내용과 방향을 소홀히 하면 예상치 못한 결과나 재앙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당선인측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나 '프로 비즈니스' 등 뜻과 지향이 불분명한 말을 뒤섞으며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서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최근까지 '기업 친화적' 규제 혁파 차원에서 마련한 메뉴는 풍성하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법인세율 인하, 지주회사 규제 완화, 중소기업 금융 및 상속세제 개편 등은 조기 추진 대상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도 시간문제다.
여기에 더해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최소화하고, 검찰의 기업비리 수사 역시 외과수술하듯이 핵심 부위에만 집중한단다. 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같아 왠지 불안하지만,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성장잠재력이 확충되고 일자리가 늘며 국민들의 삶도 윤택해진다는 단순 명쾌한 논리에 저항하긴 힘든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이런 규제들이 생긴 이유가 있을 텐데, 과연 그런 원인들은 다 해소가 됐다는 것인가. 물론 외환위기 이후 10년을 거치면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나 총수 1인지배 등의 행태는 크게 개선됐고, 기업의 지배구조와 회계 투명성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했다.
대규모 탈세나 분식회계, 금융의 사금고화가 가능했던 음습한 토양도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기업들이 이런 길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이른바 '규제'가 한 역할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규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좁은 발상으로는 규제 혁파의 진정한 목표를 이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최근 국내 언론에 소개된 조지프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부총재의 조언은 새겨들을 만하다. "친기업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좋은 규제가 필요하고 좋은 규제를 세우는 것이 바로 친기업적인 정부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미국의 주요 기업이 중동지역 등의 국부펀드에 매각되고 세계적 투자은행의 대규모 부실이 속속 드러나는 이유를 '좋은 규제나 규율의 부재'에서 찾는다.
관료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 이른바 '나쁜 규제'에 시달려온 기업으로선 이 말이 선뜻 와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장에서 기업의 고충을 듣다 보면,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나라의 체통이 부끄러울 정도로 황당한 일도 많다.
■ '양날의 칼' 잘 써야 경제 살아
하지만 쓰나미 같은 기업의 규제 철폐 요구에 휩쓸려 '좋은 규제'의 경계마저 허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업인들이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잘 하는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하는 것(임원혁 KDI 연구위원)'이 규제 혁파의 규율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 당선인은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규제개혁의 의미를 "시장에서 기업들이 창의적인 도전정신을 갖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바로 기업을 위한 길이자 근로자들을 위한 길이요, 국민을 위한 길"이라고 말했다.
'희망과 긍정'의 관점으로 충만한 당선인의 자신감일 게다. 하지만 규제개혁은 양날의 칼임을 잊어선 안 된다. 기업찬가의 메시지만 전달되면, 이천 참사를 낳은 화재가 우리 경제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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