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17대 대선 하루전인 지난해 12월18일 방북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가진 방북 대화록의 유출이 김 원장의 지시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통상 국정원장의 동선 자체가 대외비인데다가 극비 방북을 통한 북측 고위간부와의 대화내용은 기밀로 분류되는 상황에서 김 원장이 본인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를 개인루트를 통해 공개한 셈이어서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정보 수장으로서의 자질과 도덕성이 도마에 오르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적 책임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 원장이 15일 사의를 표명하며 공개한 유출 경위에 따르면 5일 대통령직 인수위에 대한 국정원 업무보고에서 국정원이 대선직전 이루어진 김 원장의 방북 배경과 경과에 대한 설명자료만 제출하자, 인수위는 방북 대화록을 요구했다. 김 원장의 대선 직전 방북이 대선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국정원은 인수위가 7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보고 자리에서도 북풍 의혹을 제기하며 김 원장의 방북 대화록 제출을 거듭 촉구하자, 8일 오후 인수위 정무분과위에 김 원장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대화록을 냈다.
김 원장은 대화록 제출 하루 뒤인 9일 오전 친분이 있는 중앙일보 모 간부와의 통화에서 방북 대화자료 제공의사를 밝힌 뒤 국정원 간부 C씨를 통해 이날 오후 대화록을 건네준 것으로 확인됐다.
김 원장은 “비보도를 전제로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자료를 받은 중앙일보는 10일자에 ‘평화회담 대화록’을 게재해 유출경위와 의도에 대한 의혹이 증폭됐다.
대화록에는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이 확실시 되나 한나라당의 대북정책도 화해협력기조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 “한나라당은 보수층을 잘 설득할 수 있어 더 과감한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 “새 정부에선 국정원장이 바뀌는 게 남한의 질서” 등 차기 집권세력에 대한 김 원장의 ‘우호적’ 언급이 다수 담겨 있다.
대화록은 ‘대외비’ 또는 ‘2급 비밀’로 분류되지 않고 ‘평문’으로 작성돼 처음부터 언론공개를 염두에 두었음이 드러났다. 국가기밀 유출의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 조치였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의혹의 눈길은 국정원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인수위는 이에 따라 인수위 내부는 물론 국정원에 대한 감찰조사를 시작했고, 청와대도 국정원에 자체 조사를 지시했다.
국정원은 조사결과를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보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에 사실관계 공개를 지시하면서 김 원장은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김 원장이 이례적으로 유출 전모를 소상히 밝히고 사의를 표명한 데는 새 정권 출범으로 지속적인 비밀유지가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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