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선물 받은 책을 슬그머니 꺼내 들었다.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담대한 희망> 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꿈꾸는 그의 도전이 워낙 대담해보여 제쳐두었는데 미 대선전의 열기를 대하면서 책에 손길이 미쳤다. 담대한>
2004년 8월 같은 제목의 기조연설이 보스턴의 민주당 전당대회장을 휘몰았다. "흑인의 미국과 백인의 미국도, 라틴계의 미국과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품위 있게 통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당시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오바마의 연설에 흠뻑 취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밤 오바마는'담대한 희망'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화롯가에서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흑인 노예의 희망, 먼 바닷가로 가족 나들이를 떠나는 이민자의 희망, 미국에 둥지를 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말라깽이 소년(오바마)의 희망. 그는 인종 차별과 갈등을 희망으로 녹여내는 멜팅 폿의 미국을 웅변했다.
사실 오바마만큼 멜팅 폿의 이상에 맞는 인물도 없다. 그는"역청처럼 검은" 케냐 출신의 아버지와 "우유빛처럼 흰" 백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누이 동생은 인도네시아인의 피가 섞였고, 그의 매제와 조카는 중국계이다.
그래서 성탄절 가족이 모이면 유엔 총회장과 비슷했다. 정체성을 고민하며 마약까지 손댔던 10대의 방황, 하버드 로스쿨 학술지의 흑인 최초 편집장을 지낸 성공담은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
그는 흑인 노예의 후손은 아니지만 흑인이 겪는 모멸을 피할 수 없었다. "음식점 밖에서 주차관리인을 기다리는데 들어서는 백인 부부들이 승용차 열쇠를 나에게 건넸다"고 그는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인종의 벽을 애써 내세우지 않는다.
그럴수록 헌법 앞에 평등한 미국인임을 강조하는 그의 어투는 과거 대선 경쟁에 나섰던 흑인 지도자들과는 선을 그었다. 그에겐'백인보다 더 백인 같은 흑인','검은 케네디'같은 수식어가 붙는다.'오바마 마니아'중에는 젊고 부유하고 배운 백인들이 많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그린버그는"왜 오바마 마니아냐고? 그가 백인의 희망으로 출마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할 정도다.
그래서 일까. 흑인의 백악관 행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3일 아이오아 코커스의 승리는 그 가능성을 열었다. 뉴햄프셔주에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게 반격을 당했지만 거의 백인들이 보낸 37% 지지는 그가 강력한 대통령 후보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의 최종 승리를 점치기는 성급하다. 뉴햄프셔에서 보였던 사전여론조사와 실제 투표의 차이는 조사자에게 오바마를 말했다가 투표소에서 마음을 돌린 백인들의 정서를 드러냈다.
흑인들은 흑인답지 않은 흑인에게 선뜻 열광하지 못하고 있다. 경선을 통과해도 본선에서는 백악관 가든에서 흑인 가족이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더 많은 보수층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법 성립 역할을 두고 힐러리와 전개한 설전은 그가 꺼려했던 인종 문제를 선거 이슈로 올려놓았다. 인종 문제가 부각되면 될수록 그의 국민통합론은 상처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희망과 변화의 메시지만으로는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격에 무너질 수 있다.
힐러리가 성차별의 유리천장을 깨기 쉽지 않은 것처럼 검은 유리천장에 다가서려는 오바마의 앞길도 순탄치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련에 굴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를 보여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김승일 국제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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