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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비정성시(非情城市)와 민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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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비정성시(非情城市)와 민진당

입력
2008.01.1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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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대만 총선에서 집권 민주진보당이 국민당에 의석의 3분의 2이상을 내주는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대

만에서 왜 민진당이 창당되고 집권했는지를 그린 허우샤오센(侯孝賢) 감독의 1989년 영화 <비정성시> 였다. 이번 참패와 영화의 메시지가 선명히 대비됐기 때문이었다.

<비정성시> 는 1947년 2ㆍ28 사건이 배경이다. 수도 타이베이(臺北)에서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파는 여인을 구타한 데서 촉발된 이 사건으로 3만 명이 넘는 대만인이 희생됐다. 사건의 이면에는 17세기 명(明) 대를 전후해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대다수 대만인(본성인)과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부터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대만으로 도망 온 1949년 사이에 대만섬으로 건너온 소수 외성인 사이의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일제 패망 뒤 외성인들이 점령자처럼 자신들을 대하는 데 불만을 품어오던 본성인들은 2ㆍ28 사건을 계기로 대만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2개 사단을 대만으로 보내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 사건은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1988년에 들어서야 리덩후이(李登輝) 총통 정부가 진상조사를 해 1995년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했다.

사건이 남긴 상처는 너무도 깊었다. 내전에 패해 쫓겨온 국민당 정부에 대한 본성인들의 반감은 사건을 계기로 지워지지 않은 문신처럼 남았다. 본성인들은 “누가 대만의 진짜 주인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성인들이 국가 요직을 독점하고 본성인을 지배하는 상황은 계엄령이라는 보호막 속에서 반세기 동안 지속됐다.

영화 <비정성시> 는 동란이었던 2ㆍ28사건과 대만 건국초기의 혼란을 4형제 중 셋째 아들만 살아 남는 비극적 가족사로 압축시켜 향후 대만의 현대사가 바뀔 것임을 예고했다. 이 예고대로 본성인들은 1986년 드디어 민진당을 창당했다. 이어 2000년 마침내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을 탄생시켰다. 천수이볜의 민진당 정부가 집권 8년간 역사 바로 세우기에 매진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당연했다. 장제스의 국부(國父) 칭호를 박탈했고, 본성인의 나라인 대만과 중국은 전혀 다른 국가임을 내세우는 대만 독립 노선을 걸었다.

■ 과거에 사로잡힌 민진당 정치

그러나 민진당 정부는 역사와 정서에 매몰되면서 과거에 갇혀버렸다. 특히 국가경영을 소홀히 했다. 대만 독립 노선을 추진하면서 중국과의 갈등이 커져 사회 전반의 불안이 가중되고 경제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6년간 국내총생산(GDP)이 13.4% 증가하는 데 그친 통계는 민진당 정부의 실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대만 국민은 이번 총선을 통해 안정과 경제 살리기를 바라고 있다고 언론은 분석했다. 8년 전 천수이볜의 총통 당선 때와는 민심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3월 총통 선거에서도 이런 민심은 바뀌지 않을 전망이어서 정권 교체는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대만 총선은 명분과 정통성에만 의지, 국가 경영에 소홀한 ‘갇힌 정치’는 결국 민심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을 일깨운 또 하나의 사례로 남을 것이다.

이영섭 베이징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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