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자기 앞의 생> 등의 작품으로, 궁핍한 이민자의 아들에서 전쟁 영웅ㆍ외교관ㆍ세계적 작가로 승승장구하다 느닷없는 권총 자살로 마무리한 극적인 삶으로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1914~1980)는 문학 독자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다. 자기> 새들은>
그의 또다른 대표작 <하늘의 뿌리> 와 <새벽의 약속> 이 출간됐다(문학과지성사 발행). 각각 68년, 85년에 첫 번역된 후 절판됐던 작품으로, 둘 다 가리의 작품 이력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새벽의> 하늘의>
<하늘의 뿌리> 는 가리가 볼리비아 주재 영사로 재직하던 1956년 발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다. 첫 소설 <유럽의 교육> (1945)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던 가리의 문명(文名)을 결정적으로 드높인 이 출세작은 출간 3개월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등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유럽의> 하늘의>
주인공은 코끼리 구호 운동가인 프랑스 사람 모렐이다. 2차대전 독일군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출감한 그는 해마다 수만 마리씩 학살되는 코끼리를 구하고자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차드로 온다.
비참한 아우슈비츠 생활을 아프리카 대평원을 질주하는 코끼리를 상상하며 견뎌낸 그에게 이 덩치 큰 동물은 “우리와 다르기는 하나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존재다.
자신의 노력을 물 밖으로 나와 허파가 생기길 기다리며 숨쉬던 선사시대 파충류에 빗대며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도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라고 말하는 모렐의 의지는 단단하다. 그는 야생보호 국제회의에 보낼 청원서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한편, 사냥꾼, 무기 밀매업자, 가죽 가공업자 등 코끼리 학살 공범들에게 가차없는 테러를 가한다.
주인공이긴 하지만 모렐이 독자와 직접 대면하는 일은 좀체 없다. 3인칭인 이 소설에서 그의 발언과 행적은 여러 주변인물의 시점과 대화를 통해서 전달된다. 다종한 주체로부터 비롯되는 이야기들은 서로 겹치고 반복되며 단순하다(출간 당시 일부 프랑스 비평가들은 내용의 장황함과 중복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리는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제각기의 입장과 경험을 가진 생생한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다채롭게 이야기를 변주한다. 아울러 인물들이 모렐의 맹목적이지만 순수한 열정에 감화돼 가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최초의 생태학적 소설’로 칭한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분명히 한다.
1960년작 <새벽의 약속> 은 가리의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이란 평을 듣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러시아에서 가난한 유대계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로 이민한 ‘나’의 유머러스한 성장기다. 동유럽에서의 어린 시절, 프랑스 정착 후 학창 시절, 2차대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인생 여정은 작가의 실제 생애와 고스란히 겹친다. 새벽의>
아버지의 부재를 상상으로 메우고, 소수계 이민자에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려 애쓰면서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나’의 성장 과정은 소설의 틀을 빌린 로맹 가리의 은밀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좌절된 연극배우의 꿈과 실패한 두 번의 결혼생활을 딛고 어머니는 생애를 온전히 아들의 성공을 위해 투입한다. 늘 “넌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야”라고 축원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수혜자인 아들마저도 종종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리게 하는 극성스러움이었다.
라켓 몇 번 잡아본 것이 전부인 아들을 프랑스의 고급 테니스 클럽에 가입시키려 마침 그곳을 방문한 스웨덴 왕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모습엔 우습다 못해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자기 조카를 내세워 에밀 아자르란 가상 작가를 창조해서 ‘몰래’ 공쿠르상을 또 받는 등 가리의 광대 같은 생애 뒤로 허영에 찬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드리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었고, 그래서 헛웃음 지은 뒤엔 가슴이 뭉클하다. 특히 전선에 나간 장성한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쳐진 어머니의 편지에 숨은 사연이 소설 말미에 밝혀질 땐 독자는 더 이상 어머니 없는 로맹 가리를 상상하기 힘들어진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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