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선수들이 코트 중앙으로 모였지만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벤치에 앉아있을 뿐이다. 몇 분 뒤 감독이 작전타임을 요청한다. 그도 벌떡 일어나 감독 곁으로 다가가 작전지시판을 유심히 본다. 작전타임이 끝날 때쯤 ‘출격 명령’이 떨어진다. “몸 풀어라.”
그의 이름은 ‘식스맨’이다. 농구에서 한 팀은 5명으로 구성되지만 ‘여섯 번째 선수’가 부실하면 결코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5명으로만 모든 경기를 치를 수는 없다. 짧은 시간을 뛰지만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소화할 식스맨이 필요한 이유다.
식스맨의 40분
프로농구 경기시간은 한 쿼터 10분씩 총 40분이지만 식스맨의 출전 시간은 20분을 넘기기 어렵다. 4~5분에 그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40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코트 밖에서 보내야 한다.
식스맨은 대부분 벤치에서 경기 시작 버저 소리를 듣는다. 몸은 코트 밖에 있지만 두 눈은 항상 코트 안쪽에 고정돼 있다. 팀이 속수무책으로 연속해서 점수를 내준다. ‘수비형 식스맨’이 나서야 할 때다. 감독 또는 코치가 따로 불러 “무조건 방성윤(SK)을 잡아라”고 지시를 내린다. 식스맨은 벤치 뒤에서 공을 튀기거나 스트레칭을 열심히 한다. 드디어 작전타임. 작전 지시를 듣는 동안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고 자신의 임무를 되새긴다.
형형색색 식스맨
식스맨은 유형에 따라 수비형(모비스 하상윤, LG 박규현, 전자랜드 정선규 등), 공격형(동부 손규완, LG 박지현, 오리온스 정재호 등), 베트콩형 등으로 나뉘지만 대개 40분을 보내는 과정은 비슷하다. 상황에 따라 감독은 투입할 식스맨을 정하고 미리 스트레칭을 시킨다. 식스맨은 ‘120%’ 활약을 하다가도 감독이 손짓을 하면 지체 없이 벤치로 들어와야 한다.
‘공수겸용’ 식스맨인 KT&G 김일두는 “오픈 찬스 땐 자신 있게 슛을 던지기도 하지만 내 임무는 어디까지나 수비”라면서 “경기 전 출전시간을 통보 받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다고 해서 더 뛰고 싶은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베트콩’은 옛말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의 임달식 감독은 현역 시절 ‘허재(KCC 감독) 킬러’로 유명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비로 허 감독을 괴롭혔다. 임 감독처럼 상대 주득점원을 무력화하는 식스맨을 일명 ‘베트콩’이라고 부른다. 베트콩은 일반적인 수비형 식스맨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명을 타깃으로 삼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이 때문에 91년 농구대잔치 챔피언결정 2차전서는 임 감독과 허 감독 사이에 주먹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가 출범한 지도 10년이 지나면서 베트콩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동부 변청운은 “아마추어 시절에는 직설적으로 ‘저 선수를 까라’고 지시하는 지도자도 있었지만 요즘엔 그런 문화 자체가 사라졌다. 단지 ‘밀착수비로 끊임없이 귀찮게 하라’는 주문은 많이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양준호 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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