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민음사전쟁과 청춘과 박수근… 裸木을 닮았던 사람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완서(77)의 소설 <나목(裸木)> (1970)의 마지막 부분이다. 소설 속의 화가 옥희도는 화가 박수근(1914~1965)이 모델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환도 전의 서울,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미군 애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먹고 사는 ‘환쟁이’ 옥희도. 하지만 그는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운, 자신만의 그림을 추구하는 화가다. 나목(裸木)>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PX 종업원 이경은 여느 속된 환쟁이들과는 다른 옥희도의 면모에 끌려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둘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간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전쟁과 청춘과 성숙의 이야기다.
이경은 어느날 옥희도의 집에서 섬뜩한 느낌의 나무 그림 하나를 본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연 혼돈 속에 괴물처럼 부유’하는 고목(枯木)의 그림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세월이 흐른 후 이경이 옥희도의 유작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전시장을 찾는 장면이다. 이경은 거기서 옥희도 그림의 나무는 고사한 고목이 아니라 ‘봄에의 믿음’을 가진 의연한 나목임을, 화가 옥희도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는다.
45억 2,000만원에 경매됐던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가 위작 논란 끝에 진품으로 감정됐다는 소식이다. ‘빨래터’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도 나목을 닮은 그 시절의 한국인들이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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