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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첫 여소야대… '물태우' 오명… DJ·盧도 '과반' 못얻어 국정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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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첫 여소야대… '물태우' 오명… DJ·盧도 '과반' 못얻어 국정 몸살

입력
2008.01.1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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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뒤 거의 모든 대통령이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에서 국회와 씨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합당이나 의원 빼오기 같은 편법으로 인위적 여대야소(與大野小)를 만들기도 했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은 원내 1당 자리는 지켰지만 과반 의석 확보엔 실패했다. 노태우 정권의 안정론보다 3김의 거여 견제론이 먹혀 든 결과다. 2공화국 이래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 평민당이 70석, 민주당이 59석, 공화당이 35석 등으로 야권 의석(174석)이 여당(125석)을 압도했다. 노 대통령은 88년 5공 청문회에서 협공을 받는 등 야3당에 끌려 다니다 '물태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90년 1월 민주당 공화당을 끌어들여 218석의 거대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97년 김대중 대통령은 여소야대 구도에서 정권을 시작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원내 2당이었고 1당인 신한국당과 자민련 민주당 등으로 의석이 분산돼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의원 빼오기와 꿔주기 등을 통해 여소야대를 돌파하려 했지만 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16대 총선에서도 여소야대를 뒤집진 못했다.

그 결과, 2000년엔 한나라당의 검찰 수뇌부 탄핵안 처리 문제로 국회가 공전했고, 개헌 이후 처음으로 새해 예산안을 정기국회 회기 내에 처리하지 못했다. 2001년엔 한나라당이 낸 3건의 국무위원 해임건의안과 탄핵소추안 등으로 국정이 몸살을 앓았다.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을 업고 과반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재보궐선거 연패와 탈당 사태로 1년여 만에 여소야대로 돌아갔다.

노 대통령과 여당은 2005년 사학법과 국가보안법 개정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지만 한나라당의 반발에 부딪혔고 행정수도 이전과 부동산 정책, 국무위원 임명 동의안 등도 사사건건 발목이 잡혔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극복을 명분으로 2005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고, 2006년엔 공개 서한에서 "여소야대 구도 때문에 국정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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