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 이틀 전 주 월남 한국대사관 직원이 생명을 건 해상 탈출을 독자적으로 결행한 사실이 14일 비밀해제 된 외교문서(1975~77년)를 통해 공개됐다. 이는 당시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하고도 우리 외교관조차 미국은 물론, 프랑스 일본 등 우방국 대사관들로부터 월남 탈출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냉엄한 국제사회의 실상과 당시 한국의 위상을 보여 주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이번에 공개된 17만여쪽의 외교문서에 포함된 김창근 주 월남 2등 서기관의 탈출수기에 따르면 월남 패망을 앞두고 열강들의 철수 러시가 이어지던 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 직원들은 긴박해진 전황에 따라 탈출을 위해 미 대사관 측이 지정한 탈출 장소인 포인트 3(국제개발처 직원 숙소 근처)로 향했지만 그 곳에는 미 대사관의 누구도 나와 있지 않았고, 탈출을 위한 조치도 없었다.
이에 따라 우리 대사관 직원들은 미 대사관으로 향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미 대사관 측은 자국 국민들을 우선 헬기로 탈출을 시켰고 우리 대사관 직원 및 교포들의 탈출을 계속 뒤로 미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미 대사관에 도착해 대사실로 들어갔던 김영관 당시 대사가 현지의 미국민과 함께 혼자 월남을 떠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대사관 직원들은 독자적인 탈출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미 대사관 측이 “본국 지시는 미국인을 우선 철수시키고 한국인을 월남인에 우선하여 철수시키라는 지시가 없었다”며 우리 대사관 직원과 교민을 도와줄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30일에도 우리 공관 직원들은 미 대사관에 남아 마지막 헬기를 타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 대원의 위협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김 대사의 탈출로 대사관 직원들은 이대용 당시 공사를 중심으로 프랑스나 일본 대사관 측의 도움을 얻으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일본 대사관 측은 “우리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준비하는 등 월맹군에 체포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탈출방법에 대한 난상토론에서 탈출하다 잡히면 더욱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 앞서 대사관 직원 대부분이 사이공에 머문다는 결정을 내린 반면, 김 서기관은 일부 교민들과 함께 3시간 거리에 있는 롱하이를 통해 해상탈출을 감행키로 했다. 사이공에 남은 이 공사는 결국 월맹군에 억류됐다가 우리 측의 노력으로 5년 뒤 귀환하게 된다.
6개의 월맹군 검문소를 통과하는 모험을 감행, 5월 3일 롱하이에 도착한 김 서기관 일행은 배를 빌려 바다로 나섰다. 도중에 선장이 베트남으로 돌아가려 하자 선장을 가두고 직접 배를 운행하다 망망대해에서 천신만고 끝에 대만 선박을 만나 싱가포르에 도착, 서울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외교문서에는 이밖에도 76년 한국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도입 움직임을 보이며 캐나다와 중수로형 원자로 도입 협상에 나서자 미국이 제동이 걸었다는 내용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내 기자회견 및 의회증언, 주한미군 철수 및 감축 논의 등 외교비사가 포함돼 있다. 공개 문서와 목록은 일반인도 외교부 외교사료관 외교문서열람실(www.diplomaticarchives.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정진황 기자 jhch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