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삶이 정말 쿨하지는 않죠. 굉장히 멋있게 넘어가는 부분, 인생에서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얼굴 맞대고 얘기를 나눠봐야 사람을 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의 주연 김민희(26)를 만나고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발랄하고 조금은 되바라진 이미지, 깃털처럼 가볍게 삶을 ‘엔조이’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었다. 담담히 속내를 털어 놓으며 “그렇지 않나요?” 하고 되묻는 눈빛엔 성숙함이 담겨 있었다. 감기기운에 잠겨 바닥으로 꺼지는 목소리가 나른한 깊이를 자아냈다. 뜨거운>
“캐릭터에 공감을 많이 했어요. 로맨틱 코미디지만 일과 사랑에 대한 갈등, 고민, 고통…. 그런 게 많잖아요. 딱 포기하고 내려 놨을 때 다시 시작되는 번민, 그런 게 계속 반복되고. 그래서 오히려 뜨겁고 따뜻하고, 그런 게 느껴지지 않나요?”
김민희가 연기한 아미는 스물일곱의 시나리오 작가다.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 까칠하고 직설적인 성격, 무릎 튀어 나온 츄리닝 차림에 줄담배와 술주정, 입에 물고 사는 욕설과 자유분방한 섹스…. 20대 여배우로서 “하겠다”고 말하기도, 소화해 내기도 쉽지 않은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는 아미의 캐릭터 속에 자신을 꼭 맞게 구겨넣었다. CF의 이미지로 김민희를 기억하는 이라면 놀랄 만한, 배우로서 성공적인 안착이다.
“술 취해 한탄하고 일그러진 얼굴들, 그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어요. 시나리오가 개방적이라 디테일한 지시가 없었죠. 만약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다른 아미가 나타났겠죠. 배우로서 뭔가를 많이 해 볼 수 있었던 작품인 것 같아요.”
1990년대 끝무렵, 김민희는 N세대의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굴곡도 깊었다. 톡톡 튀는 신선한 이미지는 유통기한이 길지 못했고 그녀의 자리는 금세 사라졌다. 몇 번의 말실수는 인터넷 공간에서 수백 배로 증폭돼 돌아왔다. 스포트라이트의 온도가 얼마나 빨리 식는지, 그녀는 또래 연예인들보다 깊게 체험했다. 반복되는 공백이 있었고,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
“예전에는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일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이상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걸 깨닫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고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기를 하고 싶다, 잘 해보고 싶다는 뜨거운 에너지가 생겼어요. 왜 살다 보면 뭔가 ‘타이밍’ 같은 게 있잖아요.”
김민희가 배우로서 각인되기 시작한 시점은 2006년 KBS 드라마 <굿바이 솔로> 에 출연하고부터. 섬세한 감정으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인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낸 그녀에게, 사람들은 ‘김민희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그 변신이 일회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굿바이>
“전도연 선배처럼 폭이 넓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하지만 꼭 누굴 넘어서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선을 정해놓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어디까지 올라갔을 때, 그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높이였으면 좋겠어요. 실망이나 좌절할 필요 없이, 그냥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으면 되지 않을까요?”
■ 뜨거운 것이 좋아세 여자, 뜨거운 삶 꿈꾸다
스물 일곱의 아미(김민희). 대낮부터 교성이 끊이지 않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담배를 물고 시나리오를 쓴다. 어서 데뷔해 언니네 더부살이를 끝내고 싶지만 수정만 벌써 17번째. 오래돼 군둥내까지 나는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시고, 구질구질한 인생에 봄볕 들 날은 기약이 없다.
마흔 하나의 싱글맘 영미(이미숙). 일에서도 남자와의 뜨거운 밤에서도 모두 프로다. 하지만 때이른 폐경이 찾아오고 화려할 것만 같던 인생에 기미가 끼기 시작한다. 남자도 연애도 아직 궁금하기만 한 고교생 강애(안소희).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전혀 뜻밖의 방향에서 '대시'해 들어온다.
<싱글즈> (2003년)에서 서른 언저리 청춘의 달차근하면서도 끈적이지 않은 삶과 연애를 그렸던 권칠인 감독이, 이번엔 '뜨거운 것'을 꿈꾸는 세 여자의 이야기기를 엮어 냈다. 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침표를 찍지 않는 느낌이다. 상투적인 해피엔딩도, 기승전결이 분명한 감정 정리도 없다. 사랑은 왔다가 흘러가고, 그래도 관계는 지속되고, 내일 아침엔 무심히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싱글즈>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겉으론 무척 쿨한 듯 보이지만, 여러 캐릭터 중 하나에 자신을 겹쳐 보게 만드는 묘한 인력이 있다. 뻔히 결말이 보이는 삶과 사랑이라도, 뜨겁게 한판 붙어보고 싶은 거니까. 17일 개봉. 15세 관람가.
유상호기자 shy@hk.co.kr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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