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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0> 세인트루이스 - 서부의 관문(關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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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40> 세인트루이스 - 서부의 관문(關門)

입력
2008.01.1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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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ㆍ11 테러 직후의 미국을 하늘길로 돌아다니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전시(戰時)라도 되는 양, 공항의 경계 태세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하긴 테러의 규모로 보나 그 반동으로 대뜸 선포된 ‘테러와의 전쟁’의 과격함으로 보나, 전시가 아니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공항의 보안요원들은 승객들의 몸을 거칠게 더듬거나 여행가방을 풀어헤치게 하기 일쑤였다.

신문 지면과 텔레비전 화면도 온통 애국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있었다. 치켜세워진 성조기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고,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In God we trust)”라는 국가구호는 달러 화폐 바깥에서도 나풀거렸다. 부시 행정부가 이런 분위기를 바라고 조장했다 하더라도, 애국심과 복수의 욕망은 평균적 미국인들의 자발성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뉴욕시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상(喪)을 당한 셈이었으니, 이런 분위기를 대놓고 탓하기도 쉽지 않았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웹스터대학교 학생 하나가 한국 기자의 눈에 비친 9ㆍ11 이후의 미국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내가 잠깐 숨을 고른 것은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대학 언론학부 돈 코리건 교수의 ‘글로벌 저널리즘’이라는 과목을 참관한 뒤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코리건 교수의 소개말을 통해서 학생들은 내가 유럽에 산 적이 있고 미국 여행은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주로 한국과 프랑스의 언론상황에 대해 물었는데, 끝머리에 여학생 하나가 미국의 인상을 물었다.

나는 9ㆍ11 테러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한 뒤, 힘이 약한 나라의 애국주의는 그 해악이 제한적이지만 미국 같은 하이퍼파워의 애국주의는 적절히 제어되지 않으면 인류 평화와 공영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9.ㆍ1을 겪은 미국인들이 애국주의를 자제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지금 그 애국주의는 적절한 한계를 벗어나 세계사를 과부하(過負荷) 상태로 몰아가고 있으며, 나는 그런 미국이 무섭다고 말했다. 더해, 파워엘리트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미국 주류언론이 선량한 미국인들에게 그런 폭력적 애국주의를 부추기며 돈다발을 세고 있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혹시라도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학생들은 박수로 동의를 표해주었다.

내셔널리그 프로야구팀 카디널스의 연고지인 세인트루이스는 미주리강이 미시시피강과 합류하는 곳이다. ‘거룩한 루이’라는 뜻의 도시 이름은, ‘거룩한 왕’이라 불렸던 프랑스 카페왕조의 루이9세(재위 1226~1270)에 연원을 두고 있다. 1763년 프랑스령 뉴올리언스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올라온 피에르 라클레드라는 사내가 교역지로 개척한 도시가 세인트루이스다. 당시 프랑스왕은 ‘사랑받는 왕’이라 불렸던 루이15세(재위 1715~1774)였는데, 그의 수호성인이 성(聖)루이 곧 루이9세였던 터라 이 도시가 ‘생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고, 뒷날 미국 영토로 편입되면서 영어식으로 세인트루이스라 불리게 됐다.

이곳에 유럽인의 발길이 처음 닿은 것은 피에르 라클레드와 그의 동료 개척자들이 생루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거의 한 세기 전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무덤으로 가득했던 이 지역을 1673년 처음 탐사한 백인은 루이 졸리에라는 프랑스인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 루이14세(재위 1643~1715)였으니, 세인트루이스는 이래저래 ‘루이’라는 프랑스 이름과 인연이 깊었던 셈이다. 실상, 루이14세의 이름을 따, 프랑스인들 손아귀에 있던 아메리카 땅(오늘날의 세인트루이스를 포함해)을 루이지애나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이다. 그 뒤 한 세기 반 동안 루이지애나의 넓이는 프랑스 본토의 네 배로까지 불어났다. 오늘날의 루이지애나주는 그 시기 루이지애나 영토의 일부분일 뿐이다.

피에르 라클레드와 그의 동료들이 뉴올리언스를 본떠 세인트루이스를 건설한 터라, 오늘날에도 세인트루이스의 여기저기선 문득문득 프랑스풍이 느껴진다. 수세기 전의 원주민 무덤들은 백인 정복자들에게 파괴돼 오늘날의 세인트루이스에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과거의 기억은 ‘무덤도시(Mound City)’라는 별칭에 남아있다. 도시의 초석을 놓은 피에르 라클레드는 미시시피강변의 라클레드 랜딩(Laclede's Landing)이라는 구역이름을 통해 지금도 일상적으로 호명되고 있다. 라클레드 랜딩은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과 상점들이 몰려있는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의 놀이터다. 이곳에선 21세기 분위기와 19세기 분위기가 서로 스며들고, 앵글로색슨풍과 프랑스풍이 뒤섞인다.

세인트루이스의 어느 저녁, 라클레드 랜딩을 걷다가 한 프랑스 식당에 들어갔다. 그 곳 풍경이 내가 파리에서 살던 때를 되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몇 해만에 코코뱅을 오물거리다 보니, 불현듯 뉴올리언스가 가보고 싶어졌다. ‘새 오를레앙’이라는 뜻의 이㎱?지닌 그 도시가 아메리카에 건설된 ‘새 프랑스’의 가장 깊은 곳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숙소인 체이스파크 플라자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마티니를 마셨는데, 말동무가 돼준 바텐더가 우연찮게도 뉴올리언스 출신이었다. 그에게서 고향 얘기를 듣고 있자니 뉴올리언스가 더욱 더 가보고 싶어졌다.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 을 읊조리던 중학생 시절부터 뉴올리언스는 내 마음 한 자락을 세게 당겼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데일 크라이셔씨가 내게 도시를 두 개 고를 수 있도록 했다면, 나는 보스턴과 함께 뉴올리언스를 골랐을 것이다. 보스턴을 향한 허영처럼 뉴올리언스를 향한 허영도 내 싸구려 낭만주의의 소산이긴 하나, 후자가 덜 비릿한 것 같기는 하다. 덜 비릿하다는 것은 덜 귀족지향적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미국에 다시 갈 수 있게 된다면, 뉴올리언스에 꼭 들르고 싶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전의 본디 뉴올리언스는 결국 볼 수 없게 돼 버렸지만.

대서양 연안의 13개 주로 시작된 미국 역사가 서부를 향한 확장의 역사였다면, 세인트루이스는 그 미국사의 통로였다. 편리한 조운(漕運)과 뉴올리언스라는 배후지 덕분에, 이 도시는 미시시피강 서부로 들어가는 문지방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진취적인, 그래서 탐욕스러운 수많은 미국인들이 세인트루이스를 통해 서부개척의 길로 들어섰다. ‘관문도시(Gateway City)’나 ‘서부로 가는 관문(Gateway to the West)’이 ‘무덤도시’보다 더 잘 알려진 세인트루이스의 별칭이 된 것도 당연했다.

라클레드 랜딩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육체를 드러내고 있는 관문아치(Gateway Arch)는 그 서부개척의 공격적 상징물이다. 이 관문아치는 제퍼슨 영토확장기념공원의 일부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프랑스 영토(루이지애나)를 나폴레옹에게서 사들여 단번에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불렸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시동을 건 새로운 영토확장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 이후 반세기의 미국 역사는 영토의 끝이었던 세인트루이스와 미시시피강이 미국의 공간적 중앙이자 대륙의 십자로가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서부개척의 역사는 국립 서부영토확장박물관에 표본화돼 있다. 그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 시선은 아마 처연했을 것이다. 그 시선이 닿는 것마다 미국 역사는 곧 정복과 학살의 역사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고, 그 위로 9ㆍ11 직후의 당시 상황이 포개졌으니 말이다.

세인트루이스대학교 국제경영학부장인 K 교수는 내가 ‘국제방문자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에서 만난 첫 번째 한국인(한국계 미국인이라 해야 하겠지만)이었다. 나는 K 교수에게 점심을 얻어먹고 그의 안내에 따라 세인트루이스대학교 교정을 둘러보았다. 캠퍼스 안에서 경영학부 건물들이 가장 크고 현대적이었다. 미국엔 졸업생들의 기부금으로 교사(校舍)를 새로 짓는 일이 많은데, 대체로 경영학부 졸업생들이 씀씀이가 가장 크다고 K 교수는 설명했다. 그럴싸하게 들렸다. 외국에서 성공한 동포를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세인트루이스의 유니언역(驛)에는 꽤 큰 쇼핑몰이 있다. 나는 세인트루이스의 마지막날 오후를 그 곳에서 보냈다. 구경은 오래 했지만, 산 것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라는 글자가 박힌 티셔츠 한 벌밖에 없다. 그 티셔츠는 지금도 더러 입는다. 야구팀 이름을 새긴 티셔츠로 내가 지녀본 것은 카디널스 것이 유일하다. 그 티셔츠 때문인지, 텔레비전에서 중계해주는 메이저리그 경기에 카디널스가 나오면, 상대가 어느 팀이든 카디널스를 응원하게 된다. 참 찌질한 인연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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