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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첫 등정 힐러리 경 타계/ '산악인의 대명사' 도전·탐험의 대장정 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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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첫 등정 힐러리 경 타계/ '산악인의 대명사' 도전·탐험의 대장정 멎다

입력
2008.01.1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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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탐험사에 한 획을 그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산악인, 탐험가로서는 물론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돋보이는 삶을 살았다.

전인미답의 처녀지 에베레스트 정상 등극의 영광을 독차지할 수 있었지만 동행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1986년 사망)에게 공을 돌린 일화는 지금도 아름다운 휴먼스토리로 남아있다. 힐러리는 정상에서 텐징의 사진만 찍고 내려왔는데 이는 서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만 쏟아질 관심을 나눠 갖기 위한 배려였다.

힐러리는 자신의 책에서 “미천한 신분을 딛고 정상에 선 텐징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힐러리와 텐징 중 누가 먼저 정상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도 “텐징과 나는 한 팀으로 함께 정상을 올랐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책을 읽고 탐험의 꿈을 키운 힐러리는 1939년 뉴질랜드 남알프스의 올리버산 등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탐험가의 길을 걸었다. 양봉업을 하면서 틈틈이 피지, 솔로몬 군도 등을 탐험했으며 2차 대전 중이던 1943~45년에는 비행정 항법사로 복무했다.

1950년대에 접어들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국력 과시의 새로운 수단으로 오지정복에 나섰고 특히 남극, 북극과 함께 세계 3대 극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에베레스트 초등을 위해 이들 국가는 총력 경쟁을 벌였다. 힐러리는 53년 4월 26일 영국의 존 헌트가 이끄는 원정대에 참가해 5월 29일 셰르파 텐징과 함께 세계 최고봉에 처음으로 오르는데 성공했다.

영국의 새 국왕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대관식(6월2일)을 불과 사흘 앞두고 일군 ‘쾌거’였다. 그는 이 공로로 기사작위를 받았지만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팀이 함께 이뤄낸 것”이라며 공을 등반대 전체에 돌렸다.

힐러리의 탐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4년 바룬 빙하를 탐험하고 56년에는 남극점에 도달했으며 히말라야 봉우리 10개를 등정하기도 했다. 57년 네팔 카트만두 외곽에서 발생한 비행기 사고로 부인 루이즈와 막내딸 베린다를 잃었지만 90년에는 아들 피터가 에베레스트 초등 40주년을 기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르는 등 가족들도 그의 탐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61년 셰르파 돕기에 눈을 돌린 그는 네팔 히말라야 산골에 학교, 병원, 다리 등을 세웠고 원주민 보급품 운반을 위해 비행장도 건설했다. 하지만 비행장 건설은 관광객 증가로 이어지고 히말라야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 받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등반 안식년을 주장하고 히말라얀 트러스트, 유엔환경운동단체 등에 가입해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85년부터는 4년 동안 인도와 네팔 주재 뉴질랜드 대사직을 역임했다. 지난 해 1월 다시 남극점을 찾았고 4월에는 카트만두를 방문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에베레스트 근방은 가보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97년에는 한국을 방문, 한국일보와 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한 에베레스트 등정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96년 쿡 산 등정을 위한 뉴질랜드 방문 길에 힐러리를 만난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뉴질랜드의 영웅으로 칭송 받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손하고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고 회상한 뒤 “달 착륙에 버금가는 놀라운 업적을 이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창만 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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