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세돌 9단을 겁나게 하겠습니다”
이창호가 4일 열린 2007년 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이세돌에게 공개적으로 ‘깜짝 선전 포고’를 했다. 지난 해에 이어 2년 연속 이세돌에게 최우수 기사 자리를 내줬지만 대신 5년 연속 네티즌이 뽑는 최고 인기 기사로 선정된 이창호는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상을 타는 건 좋은 데 매년 한 가지 상에만 치중하는 것 같다”며 이 같이 말했다.
평소 눌변으로 통하는 이창호가 모처럼 던진 뼈있는 농담에 참석자들이 모두 큰 박수를 보내며 무척 즐거워 했지만 어쩐지 농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날인 3일 전자랜드배 백호왕전 예선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기원에 나온 이창호를 잠시 만났는데 올해 자신의 최대 목표가 ‘건강 회복’이라고 했다.
당시는 그 말을 흘려 들었는데 이튿날 공개 선전 포고를 듣고 보니 ‘바로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건강 악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올해는 반드시 건강을 회복해서 다시 ‘이창호 시대’를 열겠다”는 굳은 각오가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창호는 지난해 12월 6일 이후 근 한 달간 대국이 없었다. 원래 바둑계는 연말 연시가 대목이다. 각종 기전 결승전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시즌에 이창호는 매우 한가했다. 모처럼에 긴 휴식을 취해서인지 이 날 이창호의 얼굴빛은 아주 좋았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자, “대국이 없어서 오랜 만에 푹 쉬었다. 하루에 1시간 반 정도 꾸준히 헬스 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점차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성적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얼굴에 열이 올라 불그스레했지만 지금은 제 색깔이 돌아 왔다. 그 동안 바둑 둘 때 필수 장비였던 얼음 수건을 이 날 대국 때는 사용치 않았다고 한다.
빠른 건강 회복을 위해 요즘은 술도 끊었다. 평소 주량이 소주 한 병 정도. 원래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요즘은 일체 한 방울도 입에 안 댄다. 탁구 테니스 등산 골프 등 평소 즐기던 운동도 모두 당분간 보류다. 너무 체력 소모가 큰 듯해서다. 올해 지상 목표인 건강 회복을 향한 강한 집념이 읽혔다.
이창호는 지난 해 건강 난조로 승률이 64%에 불과했다. 11살에 입단 이후 20여년만에 처음 겪은 부진이다. 주위에서는 “이제 드디어 이창호 시대가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건강 악화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곧 다시 평소 컨디션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지난 해 성적이 그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국내외 3개 기전에서 우승했으니 대충 평년작은 됐다. 이세돌이 워낙 성적이 좋다 보니 상대적으로 더 나빠 보였던 것 같다. 다만 결승에서 많이 져서 준우승이 예년보다 약간 많았던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올해는 대부분의 기전에서 예선부터 출발하므로 혹시 목진석이 작년에 경신한 최다 대국이나 최다승 기록을 다시 갈아치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지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체력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큰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기전을 선별해서 출전할 생각인가. “지금은 워낙 본선에 올라 있는 기전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걸 미리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올 중반 이후에 접어 들어 대국 수가 크게 늘어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면 그 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우문현답이다.
앞으로 있을 이세돌과의 맞대결 예상을 부탁하자 가볍게 웃으며 “이세돌을 만나려면 한참 올라 가야 할 텐데…”라며 즉답을 피했다. 하지만 이창호의 표정은 환했고 웃음 소리도 매우 경쾌해 자신감이 엿보였다. 이창호는 작년말부터 8일까지 7연승을 기록 중이다.
-다음 주에 창하오와 인터넷 대결을 한다고 들었다. 평소 인터넷 바둑을 자 주 두는지.
“자주는 두지 못한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대국보다는 주로 기보를 놓아보는 편이다. 사실 제대로 연구하려면 직접 바둑판에 돌을 놓는 게 더 낫지만 요즘은 편한 맛에 인터넷을 이용한다. 그 밖에 하루 30분 정도 바둑 소식이나 일반 뉴스를 찾아 본다. 게임은 거의 안 한다.”
-내년에 기대되는 신예들은?
“여러 사람들이 한상훈 박정환이나 그 밖에 몇몇 어린 기사들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신예들과 별로 대국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젊은 후배들과 세대 차이를 느낀다. 가끔 그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최근 바둑 인구가 감소하는 등 바둑이 침체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확실히 요즘 젊은 층이 줄어 들었다는 느낌이 있고 주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렇다고 뭐 뾰족한 대책도 없고 ….”
-요즘 프로 기전의 ‘상금제’ 전환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전체적인 방향은 옳은 듯하지만 실질적인 보완책 마련 등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창호도 올해로 벌써 서른세 살. 많은 바둑팬들의 관심 거리인 결혼에 대해서는 항상 그랬듯이 “아직 계획이 없다”는 모범 답안을 내놓았다. 마침 함께 자리했던 주간바둑신문의 신입 여기자가 “평소 눈이 높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때문인가요”라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제가 눈이 높긴 하죠”라고 답했다. 이어 “혹시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노 코멘트”라고 밝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보였다.
그리고 보니 요즘 영화도 가끔 본다는 말도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누구와 영화를 보느냐”고 물었더니 “친구”라고 했다가 얼른 “혼자서도 많이 본다”는 부연 설명이다. 순간 “금년에는 바둑도 열심히 두고 두고 인생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던 바둑대상 인사말이 겹치면서 머지 않아 좋은 소식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0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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