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무실에서 남미의 원시림까지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초국적 자본들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세계화시대. 국가와 민족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시기가 도달한 것인가?
비판사회학회가 11~12일 숙명여대에서 ‘지구화 시대 탈국가적 상상력’을 주제로 여는 심포지움은 세계화시대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여러 질문들에 대한 해법을 논의해보는 자리다. 특히 한국처럼 민족주의ㆍ국가주의적 정서가 강한 사회에서 이를 어떻게 재위치 해야 하는가를 두고 열띤 논박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 “분쟁의 근원, 동아시아의 國史를 폐기하자”
대표적인 탈국가ㆍ탈민족주의 역사학자인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와 탈민족적 상상력’이라는 발표문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을 옥죄고 있는 변경분쟁과 역사분쟁은 동아시아 시민ㆍ지식인 연대의 걸림돌이라며 민족주의의 용도폐기를 주장한다.
임 교수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분쟁, 간도를 둘러싼 한중간의 역사분쟁에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폭력성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한국와 일본의 국민들은 독도/다케시마와 같은 망망대해의 작은 바위덩어리를 ‘우리 고유의 영토’에서 떼어내면 마치 자신의 신체일부를 떼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이는 근대국민국가가 주입한 편견으로 여기서 해방되지 못하면 동아시아 시민사이의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탈민족주의ㆍ탈국가주의 전략으로 임 교수는 ‘국사’의 해체를 제시한다.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기술된) 한국의 국정교과서를 본받으라’고 촉구한 일본 극우신문 산케이신문의 논설이 보여주듯 국사를 통해 각국의 민족주의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근대국민국가 정체성훈련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국사의 해체는 필연적 수순”이라며 “이는 일국적 틀이 아니라 동아시아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념을 뺀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면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중적 민족주의’ 라는 글에서 분단적 사고의 극복과 반(反)세계화 연대의 축으로서 민족주의의 전략적 활용가능성에 주목한다.
논문은 ‘민족’ 그 자체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역사적인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일제시대에는 민족주의가 저항담론으로 활용된 반면, 유신시대의 한국사회에서는 북한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은 반공민주주의의 형태로 왜곡됐다. 김 교수는 세계화의 부정적 유산인 사회적 약자의 생존을 도모하고 사회진보를 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민중적 민족주의’의 활용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는 “외국인노동자, 국제결혼 여성의 차별 등의 문제를 세계화가 낳은 소수자의 인권문제로 한정 짓기보다는 민족문제와 결부시키면 구체적 실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순화된 애국주의로 세계화의 원심력을 통제”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세계주의와 애국주의’라는 발표문에서 지구화 시대의 담론인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낙관을 경계하며 ‘좋은 애국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는 “ ‘통제가능한 세계화’를 외쳤던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한국에 작용하고 있는 세계화의 원심력은 애국주의적 구심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든다”며 “국가에 대한 우상화, 국가와 특정인종의 동일시, 쇼비니즘 등을 의미하는 나쁜 애국주의를 민주주의와 국제주의에 의해 견제받는 좋은 애국주의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16명의 학자들이 발표자로 참가하는 이번 심포지움은 지난해 산업사회학회에서 명칭을 변경한 비판사회학회의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198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종속이론, 헤게모니론 등을 소개하며 반독재 진보진영의 이론적 수원지 역할을 했던 산업사회학회가 명칭변경과 함께 소비와 욕망, 여성주의, 생태주의, 탈민족주의, 탈식민지주의 등 새로운 감수성을 지닌 연구자들을 끌어안으려는 적극적인 몸짓으로 해석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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