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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9> 보스턴 -美문화사의 수원지(水源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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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39> 보스턴 -美문화사의 수원지(水源池)

입력
2008.01.08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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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둘러본 도시들 가운데 내가 직접 고른 곳은 보스턴 한 군데였다. 다른 도시들은 초청자인 미국 국무부가 정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부(副)문정관 데일 크라이셔씨는 미국 지도를 펼쳐 놓은 뒤, 꼭 들렀으면 하는 도시를 하나만 골라보라고 했고, 나는 얼마쯤 망설이다가 보스턴을 짚었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뉴욕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국제방문자프로그램’은 방문자가 미국 전역을 될 수 있으면 골고루 들르도록 짜이게 마련이므로, 보스턴엘 가기로 결정하면 같은 동부 지역의 다른 도시는 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뉴욕이라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보스턴엘 간 것이다.

세계경제의 수도이자 국제정치의 수도이자 현대예술의 수도라는 기회비용을 치르고 말이다. 더구나, 나 같은 미국 초행자가 아니더라도 기자라면 누구나 뉴욕엘 들러보고 싶어하던 9ㆍ11 직후에.

그것은 보스턴에 대한 내 짝사랑과 환상이 그만큼 크고 뿌리깊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짝사랑과 환상이 시작된 것은 중학교 때 읽은 에릭 시걸의 대중소설 <러브스토리> 에서였다.

그 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아서 힐러가 만든 영화(앨리 맥그로, 라이언 오닐 주연)도 세 번쯤 본 것 같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올리버 배릿4세와 이탈리아계 노동계급 출신의 제니퍼 카빌레리가 달콤씁쓸하게 완성하는 통속적 사랑은 사춘기 ‘중딩’의 예민한 가슴을 촉촉이 적셨고, 스토리만큼이나 감상적인 테마음악들의 선율과 함께 소설의 한 배경인 보스턴을 내 허영의 성소(聖所)로 만들었다.

조금 더 자라 보스턴학살이나 보스턴 차(茶)사건 같은 것을 세계사 교과서에서 읽으면서는, 미국 역사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곳이 보스턴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 보스턴 차 사건 등 독립운동 발단

게다가 보스턴은, 흔히 미국의 아테네라고도 불리듯, 미국 문화의 ‘고전성’을 대표하기도 한다. 너새니얼 호손, 랠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존 그린리프 휘티어,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이름들이 이 도시와 그 둘레에 연결돼 있다.

보스턴 라틴학교나 MIT, 터프츠, 하버드 같은 유서 깊은 교육기관들도 그렇다. 사실 이런 이름들은 주로 보스턴시내가 아니라 그 언저리에 새겨져 있다. 그러니, 내가 짝사랑했던 것은 딱히 보스턴이라기보다 매사추세츠였던 것 같고, 더 넓게는 그 둘레의 뉴잉글랜드 지역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보스턴이든 매사추세츠든 뉴잉글랜드든, 나로 하여금 그 지역을 뉴욕보다 선망하게 한 것은 명백히 문화적 허영이었다. 그 허영은 미국보다 유럽을 더 선망하게 하는 허영처럼 비릿한 것이었다.

■ 美문화 고전성 대표… 미국의 아테네로 불려

알링턴 거리 65번지 보스턴 파크 플라자는 내가 미국에서 머문 호텔 가운데 가장 고급스럽지는 않았으나 가장 덩치가 컸던 것 같다. 키는 몰라도 부피로는 말이다.

로비와 2층 사이의 메자닌에 볼룸이 여럿 있었는데, 저녁마다 이름 모를 신사 숙녀들이 거기서 떠들썩한 파티를 벌이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3주 이상 남아있었는데도, 보스턴 파크 플라자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호텔의 그런 들뜬 분위기는, 텔레비전 화면을 도배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풍경과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내가 미국엘 간 때가 9ㆍ11 테러를 빌미 삼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마무리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지만, 텔레비전 뉴스는 온통 9ㆍ11과 아프가니스탄 얘기뿐이었다.

세상에 다른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텔레비전 화면에서 9ㆍ11과 아프가니스탄을 몰아내는 일이 생겼다. 비틀스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의 죽음이었다. 해리슨은 내가 보스턴에 도착한 11월29일 작고했다. 해리슨을 추모하는 방송을 호텔방에서 보며, 나는 그의 <위딘 유 위다웃 유(within you without you)> 를 흥얼거렸다.

조지 해리슨이 작고한 다음날 보스턴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수업을 참관했는데, 담당 교수 이름이 레슬리 엡스틴이었다. 엡스틴 교수와의 대화에서 조지 해리슨과 비틀스 얘기가 나온 것은 자연스러웠다. 비틀스를 비틀스로 만든 다섯 번째 멤버, 서른두 살에 요절한 비틀스 매니저의 이름이 브라이언 엡스틴 아니었던가? 한국에서도 문예창작학과 수업을 지켜본 일이 없었던 터라, 엡스틴 교수의 수업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생들 가운데 영어권 바깥에서 이민 온 1.5세대들이 몇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참관한 수업의 첫 발표를 맡았던 이도 중국 여성이었다. 제2의 언어로 문학의 뜻을 세운 그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 아프간戰 뉴스 도배 속 조지 해리슨 사망 접해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스턴에서도, 프로그램에 따라 내가 방문한 곳은 주로 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와 언론사들이었다. 보스턴淪閨냄?터프츠대학교의 커뮤니케이션학과, 신문사 <보스턴 글로브> 에서 나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좀 덜 지루했던 곳은 루이 파스퇴르 거리의 보스턴 라틴학교였다.

1635년에 세워진 이 고등학교는 미국 최초의 퍼블릭스쿨이다. 영어과 주임이라는 메리 칼바리오 교사가 교사(校舍)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었는데,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강당에는 이 학교 졸업생 가운데 이름을 얻은 이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존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얼굴도 보였다.

보스턴 문화계의 주류 미국인들에게 질렸을 때쯤, 조그만 자극이 찾아왔다. 보스턴에서 버스로 두 시간쯤 걸리는 조그만 항구도시 뉴베드포드엘 가게 된 것이다. 포경업(捕鯨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뉴베드포드는 포르투갈 이민자 사회가 뿌리내린 곳이다. 나는 그 곳에서 포르투갈어 신문사 <포추기스 타임스> 와 포르투갈어 방송사 <포추기스 채널> 을 방문했다.

<포추기스 채널> 과는 짤막한 인터뷰도 했다. 한국 국가대표팀과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의 축구경기를 며칠 앞두고 있었을 때였던 듯하다. 첫 질문이 한국 축구에 대한 것이었다.

월드컵 본경기말고는 축구와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던 터라, 나는 포르투갈계 미국인 기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포르투갈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인터뷰 끝머리에 그가 묻기에, 나는 그의 첫 실망을 눅이기 위해 내가 가본 리스본의 아름다움을 다소 과장해 찬탄했다.

물어보는 기자도 지켜보는 스태프도 얼굴이 환해졌다. 리스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내가 스페인어를 섞어 쓰자 그들의 얼굴은 더 환해졌고, 내가 아는 유일한 포르투갈어 ‘우브리가두’(고맙습니다)로 인터뷰를 맺자 그들은 환성을 질렀다. 포르투갈어를 몇 마디라도 외워올 걸 싶었다.

보스턴에서 나는 가정집을 세 군데 방문했다. 세 집 다 보스턴 시내가 아니라 교외에 있었다. 두 군데는 프로그램에 따른 홈 호스피탤리티의 일환으로 들렀고, 한 군데는 친구 집이었다.

첫 번째는 힝햄의 한 의사 집이었다. 피츠제럴드라는 성을 지닌 스탠퍼드 출신의 이 의사는 한 종합병원에서 외과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스탠퍼드는 서부의 하버드라면서요?”라는 내 물음에, 그는 웃으며 “스탠퍼드 출신들은 하버드를 동부의 스탠퍼드라 불러요”라고 대답했다. 아이가 없이 부부 둘만 사는 그의 집은 여남은 사람이 산다 해도 한갓져 보일 만큼 넓었다. 정원에서는 멀리 보스턴항구가 내려다 보였다.

피츠제럴드씨 부부와 그 친구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집에서 몸도 마음도 그리 편치 않았다. 몸이 편치 않았던 것은 일곱 시간 가까이 흡연 욕구와 싸워야 했기 때문이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전혀 다른 계급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자의식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도 자꾸 꼬였다. 피츠제럴드씨 부부의 잘못이 절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못나, 쩨쩨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 의사·교사 집서 홈스테이 불편-편안 교차

두 번째 홈 호스피탤리티의 호스트는 은퇴해서 알링턴에 살고 있는 한 교사 부부였다. 낸시 매켄지와 폴 매켄지 부부는 60대였고, 이들 부부와 함께 나를 맞아준 친구들도 그 연배였다.

나는 매켄지씨 부부 댁에서 한결 편했다. 이들은, 자신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재떨이를 내 놓았다. ‘트인’ 미국인이었다. 피츠제럴드씨 부부의 ‘저택’에서는 뭔가 거창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매켄지씨 부부의 ‘집’에서는 자질구레한 얘기를 늘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영어도 술술 나왔다.

그러나 가장 편했던 것은 친구 L의 집에서였다. 느지막이 공부를 다시 시작해 하버드에 적을 두고 있던 L의 집에서, 나는 영어를 할 필요도 없었고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지금도 보스턴 근교에 산다. 내 기억 속의 보스턴은 에머슨이나 소로의 도시가 아니라 L의 도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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