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배급사가 원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무기의 용트림과 80년 광주의 군홧발 소리로 극장가가 와글대던 지난해 8월 중순, 한 포털사이트 온라인 청원방에 이런 글이 빼꼼 올라왔다. 같은 달 1일 개봉한 <기담> 이 블록버스터의 물량공세에 밀려 줄줄이 간판을 내린 데 따른 항의였다. 상업영화로는 참으로 오랜만인, 관객에 의한 장기 상영 요구였다. 기담>
반향은 크지 않았지만 그림자 깊은 영화계에 한 줄기 햇살 같은 소식이었다. 지난 연말, 올해 영화계의 ‘새 별’을 묻는 질문에, 평론가들은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기담> 을 연출한 정가형제를 추천했다. 기담>
“새롭다”
이름부터 예사롭잖다. ‘정가형제’.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작곡, 연극연출 등을 섭렵한 정범식(38) 감독과 대학 졸업 뒤 박찬욱 감독의 스태프로 현장 경험을 쌓아 온 정식(33) 감독이다.
둘은 사촌지간. 코언, 워쇼스키, 패럴리, 웨이츠 등 할리우드 영화에는 엔딩 크레딧에 ‘형제(Brothers)’가 붙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한국 상업영화에서(독립영화계의 김곡, 김선 형제를 제외하고) 형제가 함께 메가폰을 잡기는 처음이다. 수백 컷의 장면 장면마다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감독의 역할을 ‘나눠서’ 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내가 중학생이고 얘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함께 영화를 보러 다녔다. 내가 대학 들어간 뒤엔 고등학교 다니던 동생을 매일 혜화동 씨앙시에(시네마테크)에 데리고 가서 고전 영화를 보여 주고…. 의견 충돌? 왜 한 사람 머릿속에서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하는 고민은 있지 않은가. 오히려 혼자인 경우에, 설령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리더로서 자기 의견을 꺾기 어려울 때가 있지 않은가. 둘이 항상 의논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되레 자유롭다. 신인감독이 배우, 스태프 앞에서 괜히 주눅들 수도 있는데 우린 둘이라서 배짱이 생기더라고.”(정범식)
하지만 이들이 새로운 건 형제라는 점 때문이 아니다. 영화계가 이들을 주목하는 진짜 이유는 전에 보지 못했던 정가형제의 독특한 영화어법. 강한섭 서울예대 교수(영화과)는 “다른 장르에 비해 공포영화 장르가 구태의연했는데, 이들은 전혀 새로운 비주얼과 감성을 담는 데 공포라는 장르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평론가 김윤아씨는 “장르의 관습을 잘 알면서도 그걸 적절히 넘어섰다. 호러영화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입봉(데뷔)을 호러로 하는 것에 대해 처음엔 갈등도 했다. 하지만 준비하면서 공포영화가 가진 장점이 보이더라. 여긴 판타지가 나와도 상관없고, 귀신이 나와도 괜찮으니까. 시나리오 고치면서 어떻게 색다른 공포를 만들어보나, 장르의 묘미를 살리면서 새로운 얘기를 해보나 고민을 많이 했다. 미닫이 문이 차례로 열리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결혼을 보여주는 신(이 장면은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지난해 개봉작 가운데 ‘최고의 비주얼’로 꼽혔다)도 형과 그런 얘기를 하다가 나온 거다.”(정식)
“깊다”
그러나 <기담> 을 시각적 아름다움과 섬세한 감성의 만남으로만 읽는 것은 얕은 독법이다. 이 영화 속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형제의 복합적 은유와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영화가 의미에 함몰될까봐”(정식) 표현을 극도로 절제했기에, 그 부분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신인이라면 으레 자의식을 쏟아놓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낄 텐데, 형제는 오히려 보채는 스태프를 다독이며 지긋이 그 욕망을 눌렀다. 그 웅숭깊은 시선과 자제력이, 이들이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담>
“태평양전쟁 직후인 1942년을 영화의 배경으로 한 것, 박정희 시대가 끝났던 1976년 10월 26일에 주인공이 죽는 설정은 어떤 메타포를 담아 보려 한 거다. 정치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얘기한 것은 아니고… 시대에 순응해 사는 사람들, 순간이 영원할 거라 믿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결국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한 것인지 말하고 싶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실 자체가 정말 끔찍한 공포가 아닐까.”(정범식)
물론 이런 시도가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플롯의 탄탄함이 비주얼과 심리적 요소의 완성도를 받쳐주지 못했다.
특히 배우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허술한 연기 디렉팅은 꼭 보완해야 할 점”이라고 평했다. 전씨는 그러나 “<기담> 은 김지운 감독의 <장화홍련> 이후 한참 만에 나온 웰메이드 공포물”이라며 “정가형제의 세공력이 다른 장르에서 어떤 작품을 빚어낼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장화홍련> 기담>
지난 한 해, 형제는 평단의 찬사와 상업영화 배급시스템의 쓴 맛을 동시에 경험하며 화려한 데뷔에 성공했다. 그리고 겨울잠 자는 곰처럼 작업실에 처박혀 새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 같은 여인이 겪는 느와르(정식)와 판타지가 들어간 느와르, 혹은 ‘골 때리는’ 멜로(정범식)가 두 사람의 차기작. 서로의 초고를 읽고 멘토링을 해주고 있다. 표절과 아이디어 탈취가 횡행하는 충무로 세태에서 형제가 아니라면 꿈꾸지 못할 정겨움이다.
“여건만 맞다면(한 사람 몫의 개런티를 둘이 나눠 가져야 하지 않는다면), 다시 ‘정가형제’라는 크레딧으로 함께 연출을 하면 좋겠지…. 인터뷰 끝나고 어디 가냐고? 글쎄 우린 어릴 때부터 같이 영화 보는 거 말고는 뭐 취미도 없어서. 시네마떼끄에 고전영화 뭐하냐?”(정범식) “형, 난 조카 봐야 된다니까.(웃음)”(정식)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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