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2시 제주 서귀포시 대포동 풍림빌리지 104동 304호. 대문을 열자 오성근(43)씨가 초등학교 3학년인 딸 다향이(9)와 거실에서 글자퍼즐 맞추기 놀이에 빠져 있다. 한낮에 부녀가 함께 노는 모습이라니, 낯설다. 향긋한 냄새에 고개를 돌리자 식탁에 아빠와 딸이 함께 구운 각양각색 동물 모양의 쿠키가 군침을 돌게 한다.
오씨는 살림을 전담하는 남편, ‘전업 주부(主夫)’다. 공무원인 아내의 아침 밥상 차려 주기부터 집안 청소, 빨래, 딸의 교육과 놀이 등 모두 그의 몫이다. 오씨가 환히 웃으며 내민 명함에는 이름 밑으로 ‘house husband(집에서 일하는 남편)’가 왼쪽, ‘writer(작가)’가 오른쪽에 나란히 써 있다. “내 본업은 주부, 작가는 부업이라는 뜻”이라 한다.
오씨가 주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육아 문제 때문이다. 그는 1993년 아내 이정희(38)씨와 결혼하면서 “육아는 부모의 공동 책임이니 당신이 어려우면 내가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 때는 농담반의 약속이 현실화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러다 99년 초 출산을 앞둔 아내가 “계속 직장에 다니고 싶다”고 얘기를 꺼내면서 오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고심 고심하다 ‘그래 내가 키우자’고 결심했고 바로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그렇게 육아와 가사를 맡은 지 올해로 10년째. 능숙한 살림꾼인 오씨가 가정 생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의 ‘평등’과 민주적 의사 결정이다. 오씨는 “남편이 집에서 살림하고 아내는 바깥에서 일한다고 해서 양성 평등이 아니다”라며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을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평등 부부”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부부도 의견을 모으기 전에는 절대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다”며 “경기 과천시에서 제주로 내려오기로 합의하는 데도 꼬박 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 딸도 당당한 의사 결정의 주체다. 오씨는 “제도권 공교육 대신 대안 교육을 시키고 싶지만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딸의 의사가 더 중요한 만큼 대안 교육의 이점 등을 설명하면서 계속 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안 일 하는 오씨는 바깥일 하는 아내에게 서운한 점은 없을까. 그는 “경제권을 아내가 쥐었으니 아무래도 설움을 느낄 때가 있다”며 “특히 돈 문제와 관련해서는 나도 모르게 아내 눈치를 많이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무심코 한 아내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이웃 아주머니들과 ‘우리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고 웃었다.
그래도 주부 생활에 대한 후회는 없다. 어차피 남편과 아내, 둘 중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남편이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얻은 것이 많다. 딸과 가까워졌고, 육아 경험을 담은 책을 두 권이나 낸 작가가 됐다.
오씨는 “솔직히 살림하면서 사회와 단절됐다는 고립감도 많이 느꼈지만 내가 사랑하는 두 여자가 행복해 했으니 만족한다”며 “딸이 충분히 자란 만큼 나를 위한 일도 찾아보고 싶고 슬슬 사회 복귀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귀포=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 '바깥양반' '안주인'이 어디있나
여성의 사회 진출, 가부장제 문화의 쇠퇴 등 사회 변화와 맞물려 가족 내 권력 지형도도 달라지고 있다. ‘절대 권력’이나 다름없었던 남성 가장의 권위가 조금씩 해체되는 대신 아내와 아이들의 발언권은 크게 늘어나는 ‘권력의 분산’ 현상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전업 주부(主夫)’의 증가가 대표적 사례다. 통계청의 2006년 비경제활동 인구 조사에 따르면 집안 살림을 전담하는 남성은 15만1,000명에 달했다. 2003년 조사의 10만6,000명 보다 45%(4만5,000명)나 늘어난 것이다.
‘바깥양반’ 남성과 ‘안주인’ 여성의 자리바꿈은 일차적으로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 늘어난 데 기인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육아와 가사는 아내 몫이라는 전통적 관념이 약화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도식적인 남성상, 여성상이 무너지면서, 살림하는 남성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정 내 권력 구도의 변화 조짐은 뚜렷하다. 200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9,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아내가 투자ㆍ재산 증식을 결정한다’는 가구가 2003년 14.8%에서 2006년 16.1%로 증가했다. ‘아내가 교육 문제를 결정한다’는 응답도 36%에서 39.2%로 상승했다.
육아 휴직 남성 증가나 ‘연상녀ㆍ연하남’ 부부의 꾸준한 증가도 같은 맥락이다. 3일 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육아 휴직 남성은 2003년 104명, 2006년 230명, 2007년 11월 현재 291명으로 늘었다. 2006년 결혼한 초혼 부부 중 아내가 연상인 비율은 12.8%나 됐다.
전문가들은 이런 가족 내 권력 변화가 노인, 자녀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러기 아빠’에서 드러나듯 가정 내 남성의 소외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시각도 많다.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전반적으로 여성의 인권이나 성 평등에 대한 의식이 향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면서도 “가족 내에서도 ‘누가 결정권을 가지느냐’는 식의 권력적 접근보다는 부부와 가족 구성원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 가부장제 90년대 이후 균열
한국가족학회 부회장인 손승영(52ㆍ여) 동덕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교수는 3일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부장적 질서의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과거에 비해 평등형 부부관계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하에서 가장인 남성이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는 전권을 쥐고 여성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해 왔던 구도에 변형이 진행 중”이라고 진단했다. 일상사나 자녀 교육 등의 영역에서 아내가 결정권을 행사하는 비중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손 교수는 그러나 “부부간 평등의 관계로 가고 있지만 남성 주도의 커다란 질서의 맥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며 “평등형이라고 할 땐 남편과 아내가 모든 영역에서 일정한 수준의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하는데, 여성의 결정권은 작은 영역들에 제한돼 있다는 점에서 미흡하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손 교수는 자녀의 권력 또한 커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저출산의 흐름 속에 자식에 대한 물질적 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발언권 역시 강해졌다”며 “물론 진로 문제 등에선 자녀들에게 실질적 선택권이 확보되지 않았지만 이마저도 변화 양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정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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