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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고려가 살아 있다…'도시 박물관' 개성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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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고려가 살아 있다…'도시 박물관' 개성 속으로

입력
2008.01.08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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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은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고려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고려 박물관’이다. 개성 일반인 관광이 시행된 지 한 달, 개성은 이제 당일치기가 가능한 가까운 여행지가 됐다. 개성에는 남한 땅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고려의 유적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겨울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유익한 여행을 계획중이라면 북녘땅 개성으로의 고려 답사 여행을 제안한다.

■ 고려성균관

고려성균관은 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의 후신,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인 셈이다. 고려 문종 때의 별궁 대명궁이 있던 현재의 자리에 1089년 국자감이 옮겨왔고 1308년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처음 관광객을 압도하는 것은 노거수(老巨樹)들이다. 마당에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2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깊이를 일러주듯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안쪽 4개의 건물이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된다. 우리의 박물관과 비교하면 그 전시 수준은 안타까울 지경이다.

전기를 아끼려는 듯 어둑하기만 한 조명에 고려청자는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석관 청동향로 등은 무방비로 노출돼 관광객들의 손때에 절어가고 있다. 하지만 비록 세련된 전시실을 갖추진 못했더라도 그곳에 있는 1,000여 점의 유물들은 모두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들이다.

동무에 꾸려진 1관에는 고려시대의 개성 지도, 만월대 모형, 왕궁터 유물 등 우리나라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성립과 그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대성전에 꾸려진 2관에는 고려청자 금속활자 목판 천문기상자료 등 고려의 과학문화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있다.

2전시장에서 놓쳐선 안될 유물은 손톱만한 크기의 쇠붙이, ‘이마 전(顚)’ 자가 새겨진 쇠활자다.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에서 발견된 이 쇠붙이는 12세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다.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만든 것보다 300년을 앞선다는 증거품이다. 크기는 가로 1㎝, 세로 1㎝. 확대경을 위에 설치해 놓았다.

계성사에 자리잡은 3관에는 개성시 박연리 적조사터에서 옮겨온 적조사쇠부처가 모셔져있다. 검고 날씬한 이 철불에서는 강인한 남성적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서무에 자리잡은 4관에는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 등 고려의 금속공예 건축 조각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계성사 옆 야외전시구역에서는 불일사5층탑(951년) 흥국사탑(1021년) 현화사7층탑(1020년) 현화사비(1022년) 개국사석등(935년) 등 고려 때의 빼어난 석조유물들을 볼 수 있다.

■ 선죽교와 표충비

박연폭포와 함께 손꼽히는 개성 최고의 관광명소는 선죽교다.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숨진 역사의 현장이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선지교라 불렀다가 정몽주가 피살당한 후 주변에 대나무가 돋아 선죽교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다리는 길이 6.7m 너비 2.5m로 그리 크지 않다. 원래 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둘러 보호하고 옆에 돌다리 하나를 더 놓았다. 다리 끝쪽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얼룩을 사람들은 정몽주가 흘린 피의 자국이라고 말한다.

선죽교에서 큰길 건너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조선의 임금들이 세운 비석인 표충비 2기가 있다. 왼편 것은 영조(1740년) 때, 오른편 것은 고종 때(1872년) 세운 것이다. 암수 거북 등에 세워진 비석의 글씨는 모두 왕들의 친필이다. 이 거북의 머리를 만지면 자식을 잘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개성의 신혼부부는 이곳을 자주 들른다고 한다. 거북의 머리가 반질반질하다.

선죽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몽주의 생가가 있다. 16세기에 서원들이 설립되면서 이곳도 숭양서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정몽주와 서화담의 학덕을 기리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유서깊은 서원이다.

■ 박연폭포와 관음사

박연폭포는 황진이, 서경덕과 함께 ‘송도 삼절’로 불린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이 흐르다가 못을 만들고 그 아래로 37m 높이의 폭포를 이루고 있다. 폭포 바로 위의 못이 박연, 폭포가 떨어지는 못의 이름은 고모담이다.

고모담 한가운데 있는 바위는 용바위. 황진이가 젖은 머리채에 먹물을 적셔 휘갈겨 썼다는 이태백의 시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의 구절 ‘飛流直下三千尺 疑視銀河落九天’(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ㆍ나는 듯 흘러내린 물이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구나)’이 새겨져 있다.

폭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대인 범사정 위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오르면 아치형 축대와 문루가 아름다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대흥산성은 고려 때 천마산 성거산 청량봉 인달봉 등에 걸쳐 쌓은 둘레 10km의 돌성이다.

북문에서 10분여 더 가면 고찰 관음사가 나온다. 970년 창건된 관음사는 1477년 산사태로 무너진 뒤 1646년 다시 세워졌는데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 7층석탑. 관음굴만 남아있다.

관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는 대웅전 뒤편의 두짝으로 된 아름다운 꽃무늬의 문창살이다. 한 짝은 창살 조각이 완성됐는데 다른 한 짝은 만들다 만 상태다.

거기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운나라는 15세 소년이 이곳에서 문살을 파고 있는데 어머니가 편찮다는 전갈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관은 운나를 보내주지 않았고, 기어이 어머니가 운명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운나는 “나의 작은 재주로 큰 불효를 저질렀다”며 제 왼손목을 잘랐다고 한다.

관음굴 안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5개의 촛불에 은은히 비쳐진 그 아름다움이 놀랍다. 970년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대리석 불상은 원래 쌍으로 있었는데 하나는 평양박물관으로 옮겨갔다.

개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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