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하면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쪽에선 재벌개혁의 최후수단인양, 다른 한쪽에선 반(反)기업규제의 결정체인양, 참여정부 5년 내내 출총제 존폐 공방을 벌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나라 정부정책에서 이처럼 지겹도록 다투고 실랑이를 벌였던 예가 또 있었나 싶다.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 출총제는 사라질 운명이다. 그 동안 죽기살기로 '없애라' '못 없앤다'고 격한 논란을 벌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싱거운 퇴장이란 느낌마저 든다.
꼭 정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출총제를 고집하는 것은 더 이상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폐지로 인해 얼마나 신규투자가 이뤄질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기업들이 그토록 없애주기를 원하는데 더 붙들고 있다는 것은 '심술'밖에는 안된다. 사실 출총제를 없앤다고 문어발식 확장이 부활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출총제는 숱한 손질로 이미 누더기 상태다.
문제는 공정위다. 출총제와 공정위가 등식화된 탓에, '출총제 폐지=공정위 축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단 한명의 직원도 파견하지 못함에 따라, 공정위는 이제 출총제를 떠나 스스로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됐다.
언뜻 보면 '새 정부=친기업'이고 '공정위=출총제=반기업'이니, 단순하지만 '새 정부=반공정위'란 3단 논법을 주장해도 딱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궁지에 몰린 공정위가 애틋해서가 아니라, 이 기구에겐 시장경제질서를 위해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비자보호다.
워낙 관심을 끌어서 그렇지, 출총제는 공정위의 몸통이 될 수 없다. 독과점과 담합으로부터, 카르텔로부터, 우월적 지위로부터, 허위ㆍ과장광고로부터 소비자들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공정위에 부여된 고유임무다.
담합은 시장경제의 가장 큰 적이다. 소비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기업이 가로채는 일종의 도둑질이다. 그 감시는 공정위 말고는 누구도 못한다.
기업들은 이마저도 싫을 것이다. 인수합병(M&A)에 대해 일일이 승인을 받아야 하고, 사업자끼리 가격협의도 맘대로 못하고, 경품ㆍ판촉마저도 제대로 줄 수 없는 것이 귀찮을 것이다. 그래서 출총제를 떠나, 공정위의 존재 자체를 '규제'로 여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세계를 보자. 미국의 반독점당국은 삼성전자 대한항공 등 굴지의 국내 수출기업들에게 가격담합협의를 적용, 수억달러 벌금에 인신구속조치까지 내렸다.
유럽연합(EU)은 소프트웨어를 끼워 판 마이크로소프트(MS)에게 무려 5억유로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고, 관련소송에서 EU법원은 기꺼이 경쟁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분명 경쟁규제를 점점 더 죄는 쪽으로 가고 있다.
공정위는 시장의 심판이다. 심판은 원래 휘슬을 부는 사람이다. 선수들로선 심판의 존재, 심판의 휘슬이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선수가 싫어한다고 해서, 심판으로부터 휘슬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 친(親)선수적 경기운영을 한다고 해서, 심판의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규제'로 몰아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인수위는 출총제 폐지와 공정위 역할을 별개로 다뤄야 할 것이다.
시장경제는 엄정한 감시가 있을 때 비로소 꽃피울 수 있다. 감시 없는 시장은 기업들의 놀이터와 다를 게 없다.
경제산업부 이성철 차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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