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불가사리’(지하)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이다. …불안해 보일 만큼 기발한 착상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며 역동성을 잃지 않은 작가적 역량이 돋보여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2005년 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심사평)
소설가 윤이형(32ㆍ본명 이슬)씨는 2005년 가을 ‘지하’라는 필명으로 등단했다. 공모를 주관했던 중앙 일간지에 윤씨의 당선 소식이 큼지막히 실렸고, 무려 8편을 투고했는데 모두 평균 이상의 수준을 보여줬다는 평이 나왔고, 한 예심위원이 그가 낙선할 경우 문예지에 추천하겠다며 연락처를 따로 적었다는 후문이 들렸고, 시상식장에 아버지인 소설가 이제하씨가 나타나면서 그의 출신이 밝혀졌다. 화려한 데뷔였다.
윤씨는 기대에 확실하게 부응했다. 윤이형(尹異形)으로 필명을 바꾸고 이듬해 4월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 <문학사상> 에 나란히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작년 말까지 여덟 계절 동안 16편의 중단편을 쏟아냈다. 문학사상> 현대문학>
기록적인 수치다. 그가 최근까지 직장 생활을 병행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덕분에 작년 봄까지의 발표작으로 10월에 첫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펴낼 땐 맘에 드는 작품을 골라 묶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고도 2, 3편만 더 보태면 책 한 권 분량이 나올 만큼 작품이 쌓였으니, 올해가 가기 전에 윤씨의 두 번째 창작집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셋을>
#윤이형의 소설은 고통을 찍는 카메라다. 고통의 현상을 피상적으로 찍는 범상한 카메라보단 고통의 내면 깊숙한 자리에서, 고통의 심연을 찍는 내시경 카메라에 가깝다. (문학평론가 우찬제)
다작임에도 윤씨는 작품마다 남다른 개성과 문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첫 소설집 수록작품 중 표제작은 ‘2006 올해의 좋은 소설’, ‘피의 일요일’은 ‘2007 젊은 소설’에 각각 선정됐다. 평론가 김윤식씨는 “유별나고 섬세한 구성미를 보여준 ‘셋을 위한 왈츠’, 진부한 주제에 놀랄 만한 생기를 불어넣은 ‘안개의 섬’ 등에서 윤씨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고 평했다.
기자가 지난달 말 활발한 현장비평을 하고 있는 30, 40대 소장 평론가 10인에게 등단 5년차 이내 신예를 대상으로 ‘새해 가장 두각을 나타낼 소설가’를 물었을 때도 윤씨는 김미월 김태용 서유미 정한아씨 등과 더불어 첫손에 꼽혔다.
윤씨는 “큰일 났구나 싶다”고 말했다. 이어 “큰일 났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대학을 졸업한 99년 직후부터 윤씨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여러 종류의 매체를 전전하며 글 써서 먹고사는” 생활을 해왔다.
취직이 잘된다기에 영문과를 택한 대학 생활은 2학년 때부터 취업 공부에 매달리며 팍팍하게 보냈다. 평범한 일상이 어쩌다가 문학에 대한 허기를 키웠는지는 윤씨 자신도 잘 모른다. 그는 소설집 발문에 이 미지의 회심에 대해 “아이를 갖게 되었다.
당혹스러웠고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미 생긴 생명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낳기로 했다”라고 적었다. 직장을 다니며 3개월 과정의 소설 창작 강의를 들었고, 이 때 과제로 쓴 8편을 다듬어 투고한 것이 윤씨 표현에 따르면 “소설을 쓸 줄 모른 채 등단하는” 계기가 됐다.
#사회가 첨단화되면서 10대, 20대들은 22, 23세기식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잖아요. 이런 상황인데 문학이 윗세대의 이야기로만 채워진다면 이상하죠. 좀더 미래적이고 혁신적인 것, 낯설고 규정되지 않은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윤이형)
윤씨의 작품엔 비현실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소설집 속 ‘피의 일요일’ ‘안개의 섬’엔 게임의 세계가 삽입됐고, ‘판도라의 여름’엔 SF 기법이 도입됐다. 최근 발표한 작품들은 가상 색채가 더 또렷하다.
‘아이반’(내일을 여는 작가 2007년 여름호)에선 사이보그가 등장하고, ‘마지막 아이들의 도시’(작가세계 2007년 가을호)와 ‘큰 늑대 파랑’(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에선 묵시록적인 미래가 펼쳐진다. 이처럼 다양하게 변주하는 환상의 이야기들이 인간의 내면과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면서 독자의 머리를 둔중하게 내려치는 지점에서 윤씨의 작가적 개성은 극대화된다.
창작의 동력이 되는 원체험을 묻는 질문에 윤씨는 “그런 건 없지만 예술가 혹은 예술가에 준하는 인물들의 얘기를 자주 쓰게 된다”고 답했다. ‘DJ 론리니스’의 일렉트로니카 음악 디제이, ‘마지막 아이들의 도시’에 나오는 기형(畸形)의 화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윤씨는 “갇혀 있는 모든 것에서 뛰쳐나가 바깥을 보고 싶다는 갈증을 늘 느꼈다”며 “현대사회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캐릭터를 자주 다루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SF를 비롯한 장르문학, 다종한 대중음악에 심취한 이유도 “서브컬처(하위문화)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나름의 전통과 역사를 굳건히 해온 이들에 대한 경의”라고 말했다. 오늘날 여러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윤씨에게도 장르 월경(越境)에 대한 욕구가 있진 않을까. 윤씨는 “문자언어의 매력이 제일 크다”며 고개를 젓는다. “어느 정도 느린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계속 변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은 문자언어만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소설 역시 무궁한 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윤씨가 밝히는 새해 계획은 소박하다. 두 번째 창작집 준비와 장편에 대한 미약한 수준의 구상. 윤씨는 “일정 부분 내 성향 때문이긴 하지만, 작품 분위기가 지나치게 염세적이라든지 가상에 비해 현실에 대한 묘사가 떨어진다는 평은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자기 쇄신에 대한 의욕을 아울러 밝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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