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정사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유포돼 망신살이 뻗친 말레이시아 보건장관이 결국 사퇴했다는 가십이 며칠 전 보도됐다. 집권당 부총재인 추아 소이 렉 장관은 종교적 반대를 무릅쓰고 에이즈 예방을 위한 콘돔 무상배포를 밀어붙이는 등, 적극적인 의료 개혁과 금연ㆍ금주ㆍ패스드푸드 억제 캠페인으로 명망을 높였다.
그러나 지난 연말, 호텔방의 몰래카메라로 찍은 DVD 복사본이 지역구 곳곳에 뿌려지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그는 소신 있는 정치인답게 1일 기자회견을 자청, 동영상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으나 사임은 거부했다.
■그는 "아내와 가족이 용서한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부인도 "좋은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충실했다"고 지지성명을 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야당과 여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압박하자, 하루 만에 모든 공직을 내놓고 물러났다.
압둘라 바다위 총리는 "용기 있는 처신"이라고 치하했고, 우리 언론도 '당당한 사퇴'라고 전한 곳이 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사이의 변전에서 두드러진 것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싶다. '물러나는 용기'를 제 때, 진정으로 보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스캔들이 마무리된 날, 우연하게도 영국 가디언 지는 '공직자의 용퇴'를 사설로 다뤘다. 영국 사회에서 공직자의 고결함과 도덕적 용기를 상징한 '용퇴' 전통이 지난 10년 사이 크게 변질, 왜곡됐다는 내용이다.
정책 과오나 비리가 문제되면 정부의 신뢰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리는 관행을 좇는 대신, 마냥 버티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는 지적이다.
여론의 압력으로 물러난 공직자를 다시 기용한 경우도 많다. 런던정경대학(LSE)의 연구 결과, 이런 행태가 공적 제도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린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정부와 공직자들도 지난 10년간 '물러나는 용기'를 자주 외면, 신뢰 추락을 부추겼다. 일이 터지면 곧장 장관 등 최고위직의 사퇴를 외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인사 물꼬를 터주기 위한 것만 '용퇴'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중요한 공적 제도인 KBS의 정치적 독립과 신뢰를 훼손한 정연주 사장이 뒤늦게 "오만한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며 자리를 굳게 지킬 뜻을 피력한 것은 희대의 개그다. 모시던 정권도 바뀌는 마당에 '물러나는 용기'를 갖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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