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최후의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말한 이는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였다. 이 문장을 조각가 한애규(53)는 꽃을 든 여인의 형상으로 다시 쓴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뻔뻔스럽게 비집고 올라오는, ‘이 죽일 놈의 희망’. 그래서 인간은 끝내 살아낸다.
한애규의 신작 테라코타 작품 50여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꽃을 든 사람’이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20일까지 열린다. 활짝 핀 꽃송이를 들고 있는 여인, 꽃더미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인, 차마 건네지 못해 시든 꽃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 질박하게 빚어낸 그녀들의 둥?E 속엔 생의 짙은 피로가 배어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놓지 않는다. 희망이자 열정이자 위안이자 소통인 그 꽃은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어 가마에 통째 굽는 테라코타는 실패 확률이 높아 작가들이 저어하는 장르지만, 한애규는 오랜 세월 테라코타를 고집해왔다. 흙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좋아서다. 1m가량 되는 ‘키 작은’ 여인들은 반죽된 흙과 수백 번 붙이고 쌓아올린 작가의 손이 서로를 부벼서 만든 것들. 유약을 바르지 않아 흙 고유의 질감이 고스란한 여체들에선 흙과 손의 마찰의 온기가 느껴진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곧잘 불렸던 한애규에게 여성성과 모성은 1980년대부터 마음을 쏟아온 주제였지만, 이번엔 그 품이 한결 넓어졌다. 자아 성취형의 강하고 힘찬 여성들을 묘사했던 예전과 달리 무심한 듯 포근하고 낙담한 듯 굳센 여성들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흙으로 빚기에 온당한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대지여서, 따스하고 너르다.
작가는 “꽃을 든다는 것은 타인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 거대한 열망의 꽃’을 전하고 싶다. …절망 속에서도 꽃을 잡고 있는 것은 마음이 포기한 일을 손이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작가 노트에 썼다. (02)736-1020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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