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꽃분홍색 모토롤라 휴대폰을 처음 본 날, 마치 날카롭고 투명한 얼음조각에 가슴을 찔린 카이(동화 <눈의 여왕> 의 남자주인공)가 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통화 잘 되면 그만이지 모양은 무슨…’ 이라던 기능 우선주의자도 여럿 모인 자리에서는 휴대폰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눈의>
구형 휴대폰은 마치 그 주인이 시대에 뒤처진 고리타분한 인물이라는 딱지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은 통신기기이기보다는 신분 상징의 도구가 됐다.
그리고 이제 휴대폰은 패션이 되려고 한다. 2008년에는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속속 휴대폰 시장 진출에 나선다. ‘기능에 대한 형태의 승리’를 외치며 휴대폰의 패션액세서리화를 외치는 이들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최신 유행의 발신지 역할을 자임하는 프랑스 파리의 패션편집매장 콜레트. 1층 입구 바로 오른쪽 매대에 호사스러운 주얼리와 아름다운 디자인 소품들이 쭉 진열돼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 물론 애플 아이폰을 위시한 스타일폰들이다. 미국의 패션전문지 ‘WWD’는 최근 “패션브랜드들의 휴대폰 시장 진출이 가속화하면서 휴대폰이 핸드백이나 선글래스처럼 백화점 액세서리 매장에 함께 진열되고 판매될 날이 멀지않았다”고 전망했다.
패션과 휴대폰의 만남은 지금까지는 삼성전자, LG전자, 노키아, 모토롤라 등 전문 생산업체와 디자이너 간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LG가 이탈리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에 디자인을 의뢰해 내놓은 프라다폰, ‘한글 패션’으로 유명한 이상봉씨와 협업한 샤인폰, 모토롤라가 돌체앤가바나와 손잡고 내놓은 MotoRAZR V3i, 삼성전자가 개발중인 아르마니폰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올해 패션브랜드들은 전문업체의 ‘부름’을 기다리는 대신 자체 벤처를 통해 직접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첫 포문은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가 연다. 리바이스는 올 봄 미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자체 개발한 첫번째 휴대폰을 선보인다. 스테인리스 스틸에 돋을새김 장식을 한 휴대폰은 탈부착 가능한 체인벨트가 세트로 구성되고, 원하는 고객은 리바이스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휴대폰에 새기는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대당 예상가격은 600달러. 리바이스는 “15~25세 감성적 소비를 하는 젊은층들이 주 고객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럭셔리 브랜드 디올과 베르수스, 크리스털업체 스와로브스키도 올해 휴대폰을 내놓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행가방 업체인 만나리나덕과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 역시 올해 안으로 휴대폰 사업에 뛰어든다고 발표했다. 만다리나덕의 휴대폰은 여행가방에 휴대폰을 매달 수 있는 장식물과 함께 개발될 예정이다.
패션업체들이 휴대폰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이 시장이 연간 10억대가 생산되는 세계 최대의 가전시장이기 때문이다. 3개월마다 신상품이 나오는 제품 사이클도 패션브랜드들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다. 제품 주기가 패션 만큼이나 빠른 몇 안 되는 분야인 것이다.
무엇보다 휴대폰이 갈수록 신분 상징의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추세가 한몫한다. 중동에서는 최신형 패션 휴대폰이 성공한 남성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휴대폰 시장이 두개의 카테고리로 분화하고 있으며 그 한 쪽이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체험하려는 부류라면, 다른 쪽은 휴대폰을 통해 스타일을 말하고 싶어하는 부류라고 단언한다.
휴대폰업계는 2011년까지는 휴대폰 시장의 20%를 패션브랜드를 포함한 비전문업체가 차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의 이니셜을 본뜬 골드펜던트가 달렸고 휴대폰을 끄고 켤 때마다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울리는 돌체앤가바나 한정판 휴대폰이 대당 550달러라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 1년 만에 2억5,6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는 사실은 패션 휴대폰의 높은 성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힌다. 소비자는 유명 패션브랜드 고유의 ‘DNA’를 휴대폰에서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음성통신기기에서 영상과 데이터를 총괄하는 멀티콘텐츠 기기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휴대폰은 단순 생필품에서 사용자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개인의 모든 정보와 취미, 생활양식이 휴대폰 안에서 통합된다. 그만큼 개성과 차별화를 원하는 목소리도 높다. 휴대폰이 패션의 논리를 따라가는 이유다. 그러나 이 같은 심리적, 사회적 소비요인과는 달리 첨단 테크놀로지의 경연장이라는 점에서 패션브랜드의 휴대폰 시장 진출이 반드시 성공적일 것이라는 예단은 섣부르다는 지적도 있다.
LG전자 MC디자인연구소의 차강희 상무는 “패션업체가 OEM 형식으로 휴대폰 시장에 직접 뛰어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패션이 기능보다 우선시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패션이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인 것은 분명하지만, 휴대폰은 다양한 정보와 통신 인프라가 고도로 집적된 제품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차 상무는 다만 “강력한 캐릭터를 구축한 유명 패션브랜드의 경우 충성도가 높은 고객들을 겨냥한 틈새시장 공략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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