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클라크 지음ㆍ한종현 옮김 / 을유문화사 발행ㆍ760쪽ㆍ3만2,000원
영광과 비극이 뒤엉킨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역정이 생생한 언어로 거듭났다. 이 책에는 굴곡진 삶과 함께 혼돈스러웠던 당대 풍경도 녹아 들어 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대공황, 금주법과 매카시즘의 광풍, 극심한 인종 차별 등 살을 에는 세파 속에서 44년을 살아 낸 흑인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한평생 불행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가난 때문에 한때 창녀였다, 최고의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호기심의 좋은 소재일뿐이었다. 대중지의 선두를 다투던 플레이보이와 에스콰이어는 비참의 나락에 빠져 있던 말년의 그녀에게 자서전을 쓰게 하느라 경쟁의 불이 붙을 정도였다.
아직 살아 있을 때 기사를 실어야 가독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 결국 ‘컨피덴셜’이라는 대중지가 그녀의 회고록을 싣는데 성공했으나, 잡지 편집인은 제목을 ‘살기 위해서는 헤로인이 필요해’로 밀어 부쳤다. 간경변증에 가난과 마약이 겹친 말년의 그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대중음악 전문 작가 도널드 클라크는 재즈라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생생히 복원해 낸다. ‘레이디 (홀리데이의 애칭) 싱즈 더 블루스’ 등 마약 문제와 소싯적 창녀 생활에 집중한 기존의 다른 전기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700여쪽의 책에는 프랭크 시내트러 등 그녀를 잘 알고 있던 동료들의 증언이 생생하다. 이 책이 재즈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그래서다.
그녀는 언제나 마약과 현금, 면도날을 갖고 다녔다. 노래를 부를 때는 섬세와 우아의 극을 달렸고 평소 장난을 즐기는 성질이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거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책은 그녀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는 지폐 다발이 테이프로 묶여져 있었다. 감출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1950년대에 레이디가 미국의 문호 윌리엄 포크너를 만났다. 업무상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러 가끔 뉴욕에 들렀던 포크너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포크너가 인종 차별 풍조가 강한 남부 출신이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나고 난 뒤 두 사람은 친구가 돼 있었다. 노작가는 그녀의 얼룩진 삶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다단한 삶을 요령 있게 정리한 것은 이미 ‘대중 음악 흥망사’ ‘프랭크 시내트라’ 등을 쓴 경험이 있는 저자의 노련한 필력 덕택이다. 그는 1970년대부터 홀리데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인터뷰 등 관련 자료를 축적해 왔다. 또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90년대에 그들 중 생존자들을 만나 다시 인터뷰하기도 했다.
역자 한종현씨는 재즈사를 총괄하는 ‘재즈북’을 옮기고 나서 이 책의 번역에 도전했다. 그는 “홍등가 흑인 특유의 거칠고 생생한 구어체가 많아 까다로웠다”며 “홀리데이라 하면 음악보다 기구한 삶에만 흥미를 갖기 십상인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통해 예인의 참모습을 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마일즈 데이비스 등 그녀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인들이 자연스레 등장하는 이 책은 미국 문화, 인종주의, 쇼 비즈니스 등을 읽어내는 눈도 제공한다.
이 책은 을유문화사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제 15권이다. 피나 바우쉬, 페기 구겐하임 등 현대 예술가를 다루고 있는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빌 에반스, 마일즈 데이비스, 쳇 베이커 등 모두 4명의 재즈 뮤지션을 포함시켰다. 한편 이 책은 부제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로 달았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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