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와 용서의 시간 후에 서로가 만날 수 있게 되길 기다립니다.”
2003년 10월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신의 집에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어머니(당시 85세)와 부인(60세), 아들(35세)을 모두 잃은 피해자 고정원(65ㆍ사진)씨. 사형폐지국 기념식에 참석한 후 그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4년의 시간이 흘러 주체할 수 없었던 분노와 원망은 사그라졌지만 매일 아침 볼을 부비던 아내와 4대 독자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만은 “죽어서야 끝날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런 원한도 없는 ‘얼굴 없는 범인’유씨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고씨는 “그 친구(유영철)의 피도 우리와 같은 색깔”이라며 “죽음을 죽음으로 되갚을 순 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그 사건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 속에 있고 보니 그를 피해자 입장에서 보게 된다”며 “사람을 죽이는 일은 피부색이나 이념, 사상이나 빈부를 떠나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도 자행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고씨는 용서의 의미를 “고통 속의 자유”라고 낮게 읊조렸다. 2004년 서울경찰청장에게 탄원서를 쓰고 유영철과 직접 편지도 주고 받았던 그는 유영철과의 만남은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저 몸 건강히 있기 바라며 조용히 지켜볼 뿐”이라고 말했다.
고씨의 두 딸과 그 자녀들은 아직도 당시의 충격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딸들이) 내 뜻을 이해는 하면서도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탓에 (아버지가) 조용히 살기를 바란다”며 “아이들의 상처와 고통을 보살피는 게 남은 생 동안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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