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무용수 강수진(41)은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공부했고,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31)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출신이다. 하지만 2006년 USA 콩쿠르(일명 잭슨 콩쿠르)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은 데 이어 2007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차지, 세계 4대 발레 콩쿠르 가운데 두 곳의 정상에 오른 박세은(19)은 순수 국내파다.
예원중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고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발레리나의 잇단 낭보는 한국 발레에 대한 자신감과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박세은을 “제 때 나타난 댄서”라고 말한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국내 발레 교육 시스템의 발전과 국제화된 사회 분위기를 만나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세은은 지난해 9월부터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히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세컨드 컴퍼니인 ABTⅡ에서 활동하고 있다. 로잔 콩쿠르 우승으로 얻은 기회다. 휴가 기간을 이용해 잠시 귀국한 박세은을 만난 곳은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연습실. 스페인 공연을 앞둔 박세은에게 휴가는 휴가가 아니었다. 조지 발란신의 <알레그로 브릴리언트> 와 <돈키호테> 파드되 등 네 작품을 공연하는데, 단원 중 유일하게 모든 작품에 출연한다. 게다가 모두 주역이다. 돈키호테> 알레그로>
“학교 작품에 참여하던 것과 프로 발레단 생활은 극과 극이에요. 선생님 없이 스스로 모든 걸 해야 하니까 어렵긴 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워요. 춤을 추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많아졌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습이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 뉴저지의 아파트에서 맨해튼의 발레단까지 지하철과 버스, 기차를 갈아타며 1시간을 가야 하는 출퇴근길,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인 저녁시간…. 10대 소녀에게는 버거울 법한 외국 생활이지만 박세은은 “발레단 생활이 즐겁고 감사하다”고 했다.
아름답고 우아한 겉모양과 달리 극심한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게 발레다. 춤을 추는 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박세은은 “신기하게 춤을 출 때는 힘들지 않다. 끝난 뒤에는 물론 많이 아프지만 춤을 추는 순간의 희열이 자꾸 춤을 추고 싶게 만든다”고 답했다.
그는 로잔 콩쿠르 때도 독감과 골반 통증에 시달렸다. 콩쿠르 측은 포기를 권했지만, 순서를 맨 뒤로 바꿔가며 출전을 강행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얼음찜질로 열을 식혔는데 무대에 서는 순간 기적처럼 괜찮아졌어요. 의지가 있으면 몸은 다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박세은의 강점으로 꼽는다. 신체적 조건과 예술적 표현력, 기술 뿐 아니라 강한 정신력을 지녔다는 것. 박세은도 “제가 욕심이 좀 많거든요.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해요. 저보다 잘하는 무용수들이 가진 능력도 다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박세은이 처음 토슈즈를 신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어머니 최혜영씨가 유달리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딸을 국립발레단 문화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10년 전 박세은은 지금과는 달랐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한 해 유급을 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시험에서 낙방해 재수를 했다. 하지만 특유의 집념으로 독하게 연습을 하면서 중학교 2학년 이후 실력이 크게 늘었고, 때마침 키도 훌쩍 자랐다. 예원중 수석 졸업과 국내 각종 콩쿠르 석권, 그리고 국제 콩쿠르 입상이 차례로 이어졌다.
박세은이 1등을 한 로잔 콩쿠르는 강수진이 1985년 동양인 최초로 입상한 곳이기도 하다. 박세은은 강수진과 유독 인연이 많다. 2006년 강수진이 발레 유망주를 위해 경매에 내놓은 토슈즈 수익금이 박세은에게 전달됐고, 박세은은 그 돈으로 토슈즈를 샀다. 지난해 ‘강수진과 친구들’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던 박세은은 “강수진 선생님의 <오네긴> 을 보고 눈물이 났다”면서 “진심으로 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마흔이 넘어서까지 절대 춤을 출 수 없다”고 말했다. 오네긴>
요즘 박세은은 ABTⅡ에서의 연수가 끝나는 5월 이후의 행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발레단에서는 남기를 바라고 있거든요. 메인 컴퍼니로 올라가는 기회도 생길 수 있구요.” 박세은은 “다른 인종에 배타적인 유럽 발레단과 달리 ABT는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 받아들인다. 그래서 세계 최고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ABT의 수석무용수가 꿈이냐”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로잔에서도 그랑프리는 생각도 못했어요. 2등을 한 무용수에게 미리 축하한다고 인사까지 했는걸요. ‘어디서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보?않았어요. 그저 좋아하는 춤을 많이 추고 싶을 뿐이에요.”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 박세은, 발레 향한 '순수한 성깔' 타고난 모범생
1년 전 이맘때 김선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춘향가> 의 주요 장면을 발레로 공연한 적이 있다. 판소리 고유의 장단, 추임새, 독특한 가사 내용을 유연한 발레 언어로 풀어내던 춘향 역할의 소녀가 바로 박세은이었다. 음감의 표현력이 놀라웠고, 특히나 발레리나다운 생김새가 아름다워 이후로 필자는 박세은을 줄곧 ‘춘향이’라 불렀다. 춘향가>
공연 몇 개월 후, 박세은이 스위스 로잔 발레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오다가다 우연히 ‘자네 춘향이지?’라며 근황을 불어볼 기회도 있었다. 그때마다 박세은은 아주 자연스럽고 겸손하게 발레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2년 전쯤 동아무용콩쿠르 심사를 맡았을 때도 당찬 기질을 침착함으로 내리누르던 한 소녀에게 매료된 기억이 있다. 계산을 맞춰보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의 오로라 공주 솔로를 추던 그녀 역시 박세은이었다. 당시 서울예고 1학년이었던 박세은은 고등부 금상을 수상했다. 잠자는>
몸을 휘돌리며 ‘사랑가’에 맞춰 춤추던 춘향과 마디마디가 근엄한 고전발레의 전형 오로라 공주는 참으로 다른 분위기지만, 박세은은 역할 해석에 대한 영민한 재능으로 매번 객석을 사로잡았다. 발레를 향한 ‘순수한 성깔’을 타고난 모범생으로 평가받는 만큼 여러모로 기대가 큰 한국 발레계의 희망이다.
박세은은 고등학교 3학년 나이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로 발탁되어 지난해 대학생이 됐다. 그러나 그 월반의 기쁨을 채 일 년도 못 누리고 로잔 콩쿠르 장학금으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세컨드 컴퍼니에 입단했다. 게다가 더 공부할 기회를 갖고자 입단한 그곳에서도 주역을 도맡고 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스타에 도전할만한 인재가 어떻게 성장해갈지, 그 과정을 애정어린 관심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우리 관객들의 역할이다.
●박세은 프로필
1989년 12월 5일 서울 출생
2002년 예원중학교 입학
2005년 서울예고 입학
2006년 USA 콩쿠르(잭슨 콩쿠르) 금상 없는 은상, 중국 베이징 콩쿠르 2위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 입학. 스위스 로잔 콩쿠르 1위
문애령ㆍ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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