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드레스드너방크의 유럽지역 이코노미스트인 라이너 군터만은 독일경제가 더 이상 유럽의 ‘병자(病者)’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지금 독일 경제는 2~3년전과는 판이하다. 월드컵 효과가 반영된 측면도 있지만 메르켈 총리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첫 여성 지도자인 기민당(우파)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좌파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지 2년. 독일경제는 다시 활기찬 비상을 준비중이다. 1%에도 못 미치던 성장률은 2006년 2.7%, 올해와 내년에도 2%대의 견고함이 예상된다. 한때 2005년 13%에 육박했던 실업률도 올해 8.7%(IFO경제연구소 추정)로 하락한데 이어 내년에는 7.9%까지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말 메르켈 총리 취임 당시 독일경제는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이른바 ‘독일병.’ 메르켈 총리는 먼저 노동개혁에 손을 댔다. 독일 노사관계의 상징이던 ‘노조의 경영참여’를 대폭 축소하는 한편, 신규 채용자 자유해고기간을 6개월에서 2년으로 확대하는 등 경직된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불어 넣는데 주력했다. 대신 기업들의 투자ㆍ고용확대를 위해 39%인 법인세율을 30% 미만(29.8%)으로 낮췄다.
2009년부터 고용주 부담을 줄이는 대신 보험재정을 확충하는 건강보험 개혁안도 의회 승인을 받았다. 연금수령 연령을 현행 65세에서 67세로 점진적으로 상향조정하는 연금개혁안, 재정적자 축소를 위해 공무원수를 2010년까지 8,000여명 감축하기로 하는 안도 마련됐다.
사실 메르켈 총리의 강력한 개혁정책은 좌파인 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아젠다 2010’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슈뢰더 전 총리는 자신의 지지세력인 좌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쉬운 고용 및 해고 ▦실업급여기간 단축 ▦연금ㆍ의료보험 운영 현실화 ▦중소기업의 세부담 축소 ▦민간기업의 직업훈련촉진 등 독일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개혁입법을 주도한 인물. 좌우 이념은 다르지만, 적어도 개혁프로그램에 관한 한 미르켈은 슈뢰더의 계승자인 것이다. “메르켈 총리의 가장 큰 업적은 슈뢰더 전 총리의 개혁정책을 성실히 이행한 것”이라는 게 독일인들의 판단이다.
세계적 홍보대행사 웨버 쉔드윅 독일법인의 아스트리드 폰 루돌프 사장은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메르켈 정부는 슈뢰더 정부의 개혁 정책의 방향을 계승하고 있다”며 “슈뢰더 정권의 ‘아젠다 2010’에서 시작된 수년간의 노동시장 개혁 조치가 최근 고용 창출과 경제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카엘 쿠피어스 삼성전자 독일법인 기업 마케팅 책임자도 “지금의 경제적 변화는 ‘아젠다 2010’ 정책의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메르켈 총리의 개혁정책이 기업인들에게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사민당의 복지정책이 기업에 불리하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언급했다.
메르켈은 우파이고, 그의 개혁 역시 우파적이다. 그렇다고 독일 경제정책이 무조건 ‘우향우’한 것은 아니다. 최근 우편노동자의 최저임금제 시행을 둘러싼 갈등이 단적인 예다. 독일정부는 새해 우편시장 개방을 앞두고 우편분야 종사자에 대해 시간당 8~9.8유로의 최저임금을 보장키로 결정했다. 이는 기민당과 연정파트너인 사민당이 최근 중도노선에서 벗어나 좌파적으로 선회하면서 내세운 정책 중 하나. 물론 경제계는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고용시장을 악화시킨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기민당 정권도 결국 최저임금제를 확대해나갈 것이란 게 일반적 관측이다.
하지만 갈등과 혼란, 노선 대립에도 불구하고 독일경제는 살아나고, 더 튼튼해지고 있다. 피어 슈타인브뤽 독일 재무장관은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독일의 비상(Germany Rising)’에서 독일 경제 시스템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독일 내부만 보면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은 독일발전의 기초가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검증된 시스템이라고 해도 시의 적절하게 적용돼야 한다. 독일은 경제적 효율과 사회적 형평성, 환경과 자원의 보호 문제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비록 수술이 진행 중이지만, 지금껏 독일 경제를 지탱해 온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이 없었다면 지금의 부활도 불가능했을 거라는 얘기다. 따라서 메르켈의 개혁은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종래의 ‘과잉ㆍ무한복지’를 ‘지속가능한 복지’로 체질을 바꿔나가는 과정으로 평가해야 한다.
정대영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은 독일경제의 힘에 대해 “시스템과, 프로세스, 그리고 교육의 힘”이라고 진단했다. 정 소장은 “고속 경제성장과 고용 창출을 지속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교육과 훈련에 대한 투자라는 믿음이 강하다. 이런 평생교육이 탄탄한 시스템과 프로세스로 자리잡으면서 경쟁력의 요체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ㆍ프랑크푸르트=이영태기자 ytlee@hk.co.kr
■ 미카엘 부르다 훔볼트大 교수가 말하는 '일하는 복지'
국내 언론에는 메르켈 총리의 개혁이 ‘복지국가의 실패’로 비춰지고 있다. 나아가 성장주의가 분배주의를 눌렀으며, 결국 ‘우파의 승리=좌파의 몰락’으로까지 해석하는 분위기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카엘 부르다 훔볼트대학 노동연구소 교수를 베를린에서 만나 최근 독일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의 성격과 지향점에 대해 들어봤다. 부르다 교수는 최근 유럽연합(EU) 주최 세미나에서‘독일 노동시장, 어떻게 회복했나’라는 주제 발표를 하는 등 주로 독일 노동시장 및 사회복지 관련 연구를 해왔다.
부르다 교수는 “일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써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라며 “살아남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결국에는 모두가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분배를 위한 성장이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복지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보죠. 독일의 자동차가 한국이나 일본 자동차에 밀려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면, 어디에서 돈을 벌어서 복지를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메르켈 개혁의 성격에 대해“과도함에 대한조정”이라고 평가했다. “독일은 굉장히 부자 나라입니다. 신흥시장이 추격해 오면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복지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미세 조정을 하는 것뿐입니다.”실업 수당을 예로 들었다. “과도한 실업수당이 근로자들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가 실업자들에 대해 보장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이전에는 실업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수당을 지급했다면 지금은 노동관청에 가서 매월 실업 상태임을 신고해야 한다”며 “노동관청에서 소개해 준 일자리를 세 번 거절하면 실업 수당이 줄어든다”고 했다. 무조건적으로 복지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생산적인 기능을할 수 있도록 손을 대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브루다 교수는 지금이 한국 경제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굉장히 성공적인 나라이며, 외환위기를 훌륭하게 극복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하지만 주변국인 중국이 급성장하고 있는 지금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아시아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한국의 벤치마킹 국가는 덴마크. 그는“덴마크는 경제 수준이 상당히 높으면서도 사회복지가 잘돼 있는 나라”라며 “덴마크처럼 작은 나라의 장점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베를린=이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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