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총선 유세 과정에서 허망하게 암살됨으로써 ‘9ㆍ11 테러’이후 미국이 벌여온 테러와의 전쟁이 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독재로 치닫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무샤라프 살리기’정책이 부토 암살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무샤라프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고 파키스탄 정정이 불안해지자 미국이 선택한 카드는 망명 중이던 부토 전 총리를 귀국시키는 것이었다.
무샤라프와 부토 전 총리가 협상을 통해 권력을 분점토록 함으로써 민주적으로 정정 불안을 해소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무샤라프_부토 정권으로 하여금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하는 ‘두 마리 토끼 쫓기’였던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파키스탄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 경우 핵무기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독재자 무샤라프를 지원할 수밖에 없게 만든 요인이었다.
28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부토 전 총리가 10월 귀국 직전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전화통화를 하는 등 부토의 귀국에 미국이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샤라프에 대한 미국의 ‘울며 겨자먹기식’집착은 무샤라프가 부토 귀국 후 비상 사태를 선포했음에도 비상조치 해제와 조기총선 실시를 촉구했을 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미국은 부토가 암살됨으로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잃는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됐다. 파키스탄의 혼란은 오히려 격화하고 있고 부토 암살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 부상하면서 파키스탄 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인접국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접경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대테러전이 탈레반의 세력 회복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지경에서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미국에서는 아프간전에 대한 위기감이 이라크전에 대한 우려 못지않게 증폭되면서 본격적인 대선 쟁점으로 비화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권력분점을 통한 정정불안 해소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부토를 대신해 무샤라프와 친미 연합정권을 형성할 새로운 대안세력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야당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_N)를 이끌고 있는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가 대안으로 유력시된다.
그는 부토 전 총리의 정치적 라이벌이면서 파키스탄 야당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부토 전 총리가 이끌던 파키스탄인민당(PPP)의 2인자 그룹에 속해있는 아민 파힘과 통화를 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PPP에서는 변호사이자 의원인 아이트자즈 아산도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으나 부토를 대체하기에는 무게감이 적다. 미국은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무샤라프 단독 정권을 다시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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