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 논란으로 대선 정국이 정점으로 치닫던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폭로의 주인공이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을 지낸 인사라는 점에서 파장은 적지 않았다.
삼성이 자신 명의로 차명계좌를 운용했다고 주장한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김용철(49)변호사는 이후 추가 의혹을 연이어 터뜨렸다. 검찰이 특별수사에 나섰고, 이제 삼성 비자금 의혹은 특별검사의 수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 27일 그를 만나 삼성과 검찰을 정면 겨냥한 그의 싸움이 '무모한 시도인지', 아니면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그것인지'를 물었다.
▲ 폭로 이유와 배경은 뭔가
삼성 고위 임원 출신에서 '내부고발자'가 된 김 변호사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비자금 의혹 폭로 직후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모자를 쓰고 다닌다"며 불안해 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삼성과 싸우는 투사처럼 돼 버려 부담스럽다"면서도 "삼성의 한 노동자가 '회사가 7,000명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었는데 덕분에 중단됐다'고 최근 감사 전화를 해왔다"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폭로 배경이 궁금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법무법인 서정(김 변호사가 투자한 로펌)측에 자신의 퇴사 압력을 넣는 바람에 서정을 나와야 했던 지난 5월부터 폭로를 고민해 왔다고 했다. 물론 삼성은 압력설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2004년 8월 삼성 퇴사 후 3년이나 지난 시점에 갑자기 삼성과 왜 격한 대립관계가 됐는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없다. 가정불화와 삼성과의 돈 문제 등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목청을 높였다. "돈 때문이라면 내가 폭로를 하기 전에 삼성과 협의를 하지 않았겠느냐.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삼성은 1조원이라도 내놨을 것이다. '내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나 돈이 필요했다'는 루머까지 나돌지만 나는 술을 못 마셔 룸살롱에 가지도 않는다."
김 변호사는 대신 폭로 과정을 설명했다. "5월부터 많이 고민했는데 몇 군데 언론과 시민단체에 문의한 결과 모두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꼭 폭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원래 '봐달라'는 외부 청탁이 들어오는 사건이 진짜 사건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삼성과 악연이 된 구체적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 검찰 수사결과 공감하나
검찰은 김 변호사의 폭로를 토대로 약 2개월 간의 수사를 통해 삼성 전ㆍ현직 임직원 150여명 명의로 개설된 차명 의심 계좌 500여개를 찾아 냈다. 검찰 특별수사ㆍ감찰본부 박한철 본부장은 수사 종료 브리핑에서 "김 변호사 진술의 골격은 맞다"고 밝혔다. 이로써 애초 김 변호사가 폭로했던 내용에 대한 의구심은 상당 부분 해소된 셈이다.
김 변호사는 검찰 수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쉬운 대목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후배 검사들은 최선을 다 했다. 검찰 일부에서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삼성물산 등 핵심 계열사를 압수수색 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나는 삼성의 차명 지분을 알고 있는 국세청까지 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성의 비자금 전체 규모가 제대로 드러나면 10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변호사는 특검 도입을 촉발시킨 이른바 '삼성 떡값 검사' 부분에 대해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물증이 없다'는 지적에 "특검 수사에서 다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은 대선 자금 수사에서도 대통령에게 돈을 준 것을 다 말하지 않았냐"고 답했다.
▲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김 변호사는 폭로의 최종 목표를 '삼성의 정상화'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삼성 의혹의 핵심은 사주인 '이씨 일가 비리'다. 삼성 전략기획실의 해체를 넘어, 삼성이라는 하나의 기업에 의해 국가가 좌지우지 되는 것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정부 핵심 부처의 삼성 장학생 신화를 깨고, 모든 국가 사회가 정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특검의 관련자 처리 수준에 대한 의견을 묻자 "삼성은 이건희 회장보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만 보호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특검 수사가 삼성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주장인 듯했다.
고주희기자 orwell@hk.co.kr박관규기자 qoo77@hk.co.kr
■ 특검 105일… 로비·비자금 조성 주요 타깃 될듯
김용철(49)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및 떡값 검사 의혹 폭로에서 비롯된 조준웅(67ㆍ사시 12회) 특별검사호의 출항이 초 읽기에 들어갔다. 조 특검은 최근 가급적 외부와의 접촉은 자제한 채, 3명의 특검보와 30명의 특별수사관 인선 등 본격 수사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달 10일께 시작될 특검팀 수사는 일단 검찰 특별수사ㆍ감찰본부(본부장 박한철 울산지검장)가 남긴 각종 수사자료에서 출발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특수본부는 검사 15명, 수사관 40여명을 투입, 비자금 의혹의 실타래를 풀어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각종 물증 수집에 주력해왔다.
검찰 특수본부가 그 동안 확보한 자료는 삼성 5개 계열사의 회계감사 자료 160상자, 삼성증권 전산센터 자료 등 압수물 72건 등이다. 특수본부는 삼성 전략기획실(구 구조조정본부)이 차명계좌 개설 등 비자금 조성을 주도했다는 관련자 진술도 확보했다.
특검은 이 같은 증거들을 바탕으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등 경영권 편법승계와 관련된 4건의 고소ㆍ고발 사건과 김 변호사가 폭로한, 차명계좌를 동원한 비자금 조성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 청와대를 비롯, 검찰, 재경부, 금감원, 국세청 등 정부기관에 대한 삼성의 전방위 로비 의혹도 수사 대상에 포함됐다. 한나라당이 제기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축하금’ 수수설을 포함, 2002년 대선 자금 제공 의혹도 진통 끝에 특검법안에 포함됐다.
그러나 특검이 최장 105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이처럼 방대한 내용을 수사해 국민이 납득할만큼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 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경영권 승계 대목은 대법원의 심리가 진행 중인 사안이어서 특검이 실질적인 결론을 낼 수 없는 구조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특검은 검찰이 다루기 힘든 법조계에 대한 삼성의 로비 의혹과 검찰 특수본부가 이미 상당한 성과물을 확보한 비자금 조성 경위 규명에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편 김 변호사의 폭로 내용 중에는 특검 수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다. 삼성과 중앙일보의 위장 계열 분리 의혹,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삼성의 불법을 눈감아줬다는 의혹 등은 특검법에 명시되지 않아 특검이 다룰 수 없게 됐다. 삼성중공업 등 계열사들의 분식회계와 삼일회계법인의 묵인 의혹도 수사대상에서 제외됐다.
전성철 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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