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남서쪽 끄트머리, 모슬포와 산방산을 경계로 그 아래쪽에 펼쳐져 있는 너른 들판을 알뜨르(‘아랫뜰’이라는 의미)라 부른다. 제주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경작지다. 지금은 밭에서 겨울 감자를 캐는 손길이 분주하다. 평화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곳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이곳은 일본 해군 항공대의 기지였다.
일본은 1926년부터 비밀리에 이곳 알뜨르에 비행장 건설을 계획했다. 대륙 침략을 위한 항공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만평 규모의 비행장이 완공된 후 1937년 8월 일본은 중국 난징에 대공습을 가한다.
나가사키의 오무라 해군 항공기지를 출발한 폭격기들이 제주 알뜨르에서 연료를 공급받은 뒤 난징으로 날아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알뜨르에서 중국 난징으로 날아간 공습이 36회, 그 투하 폭탄의 양은 300톤에 달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은 오무라 해군 항공기지를 아예 알뜨르로 옮겼고, 시설도 2배로 늘렸다. 이후 항공기지가 상하이로 옮겨가며 알뜨르는 연습 항공기지로 남았다.
그 흔적은 그대로 알뜨르에 남아있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밭 중간중간에 나지막한 둔덕처럼 생긴 시설물들이 보인다. 모두 20기에 이르는 비행기 집, 격납고들이다. 일명 빨간잠자리로 불린 폭격기 아카톰보를 감추기 위한 것들이었다. 격납고 입구는 모두 해안을 향하고 있다. 당시 사용했던 잔디 활주로도 그대로 남아 지금은 우리 공군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알뜨르 뿐만이 아니다. 제주 전역은 전쟁에 휩쓸렸다. 1945년 1월까지만 해도 제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1,000명을 넘지 않았으나 종전 직전에는 7만여명에 달했다.
당시 한반도에 배치된 일본군 병력 36만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일본이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제주 곳곳을 거대한 전쟁 기지로 만든 것이다. 종전이 조금만 늦었어도 제주는 그 비경의 많은 부분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었다고 제주에 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종전 후에는 미군이 제주에 들어와 일본군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알뜨르 비행장 옆 섯알오름에 있던 탄약고가 바로 폭파됐고, 그곳엔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이 구덩이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제주의 역사에 또다른 참혹한 한 페이지로 기록됐다.
전쟁 발발 직후 4ㆍ3항쟁 연루자 등을 대상으로 예비검속을 하고 이들을 처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에 구금돼 있던 예비검속자 357명 중 252명이 그 해 8월20일 섯알오름의 이 구덩이에서 집단 학살됐다.
1956년이 되어서야 학살 현장에서 유족들은 뼈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골의 주인은 알 수 없었다. 뼈의 형상을 맞춰 간신히 132구의 시신을 만들어 사례리의 공동묘지 한편에 묻고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라 이름붙였다. 132기의 무덤을 만들었으나 그 주인이 누구인지, 후손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뜨르를 굽어보는 송악산의 해안절벽 아래쪽에는 마라도를 오가는 배의 선착장이 있다. 송악산 해안절벽에는 입을 크게 벌린 듯한 굴이 여럿 늘어서 있다.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한 이 굴들은 파도가 만들어낸 자연굴이 아니다.
일제가 자살 어뢰정인 카이텐(回天)을 감추기 위해 파놓은 인공 진지굴들이다. 카이텐은 폭약을 실은 어뢰정에 탑승한 특공대원이 상대방 함선에 충돌하는 자살 공격용 병기였다.
알뜨르의 또다른 오름인 셋알오름 정상에는 아직 견고한 고사포 진지도 2곳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어졌더라면 이곳의 고사포들은 미군 폭격기를 향해 불을 뿜어댔을 것이다.
송악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경면 청수리 가마오름에는 평화박물관이 생겼다. 2004년 문을 연 이 박물관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가마오름 안의 진지굴 일부를 공개하고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알뜨르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전쟁유적지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내년에 마스터플랜을 완성해 2015년까지 이 일대를 평화테마공원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겨져있는 제주의 또 다른 모습인 전쟁의 참혹한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 등은 지난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제주=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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