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1일에 시작돼 6월21일에 막을 내린 오키나와(沖繩) 전투만큼 전쟁의 온갖 참상을 골고루 보여준 싸움도 드물다.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 하면 대개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아 세우는 해병들의 동상으로 유명한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를 떠올리지만, 그 혹독한 상륙전도 오키나와 전투에 비할 바 아니었다.
군인들끼리의 싸움이었던 이오지마에서와 달리 오키나와에서는 수많은 민간인이 전투에 휘말렸고, 그 때문에 전쟁터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비극이 한 편의 지옥도처럼 펼쳐졌다.
■이 전투로 미군 1만2,513명이 숨지고, 3만8,916명이 부상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6만6,000명, 부상자는 1만7,000명에 이르렀다. 민간인 희생자는 12만 명을 넘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총력전 체제에 편입돼 군인들과 함께 참호에서 지내다가 '전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미군과 일본군에 학살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숨어 지내던 동굴 속에서 수십 명씩 한꺼번에 자살한 이른바 '집단자살' 희생자도 1,000명 가까웠다. 전체 민간인 희생자에 비하면 미미한 이 '집단자살'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특별한 분노를 표해왔다.
■1983년 이래 일본 고교 교과서는 집단자살이 '일본군에 의해 강요됐다'고 기술했다. 주민의 집단자살을 일본군이 강제했다는 점은 주류 학계도 폭 넓게 인정해 온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역사파괴, 역사왜곡 운동을 본격화한 강경 우파는 이 정설이 허구라는 공세를 집요하게 펼쳐왔다.
1970년에 나온 <오키나와 노트> 의 관련내용을 문제 삼아 최근 저자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출판사 이와나미쇼텡(岩波書店)에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오키나와>
■일본 문부과학성이 내년도 고교 교과서 검증에서 집단자결이 '군에 의해 강제됐다'는 기술이 '오해의 우려가 있다'고 삭제를 요구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지식사회와 오키나와 현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 문부과학성은 '군의 관여'를 인정하는 절충안을 찾았다.
즉 '군의 강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대신, 수류탄을 나눠주는 등 군의 지도나 세뇌교육이 있었음을 자세히 밝히고 '군의 관여로 자살로 내몰린 사람도 있다'고 간접적으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일본의 집단자살 논란은 진정되는 기미지만, 아직 오키나와의 분노가 다 잠들 수는 없을 듯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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