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 뒤 감사ㆍ축하 메일을 여러 건 받았다. 거의 다 이명박 당선자측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보낸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뭘 했지? 축하 받을 일이 나에게 있었던가? 이런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됐다.
미 동부지역의 한 동포는 새벽 일찍 깨어 TV를 보다가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됐다는 발표에 벌떡 일어나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외쳤다는 글을 온라인 사이트에 썼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 좌파들을 싹 쓸어 버렸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이번처럼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는 말도 했다.
■ 보수진영의 가슴 벅찬 감격
그런 사람들의 감격과 흥분을 충분히 이해한다. 특히 '붉게 물들어 가는 조국'을 보며 멀리서 애태우던 재미동포들에게는 5년, 아니 10년 만에 이루어진 '정해반정(丁亥反正)'이 큰 활기로 작용하고 있다. 이명박 아니라 누구라도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이 좋은가 보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뒤 보수 쪽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 중 하나는 벌써부터 5년 후를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번에 모처럼 나라를 바로잡긴 했지만 반성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5년 후 나라를 다시 내주게 된다는 위기의식이다. '보수의 성찰'론이 두드러지는 것은 정권교체가 그만큼 감격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 자정운동을 제창한 한 단체는 정직 청렴 겸손을 내세우고 있다. 친북좌파세력을 이기려면 보수가 무서운 존재가 돼야 한다고 이 단체는 주장한다.
무서운 존재가 되는 방법 중 중요한 것은 정직 청렴 겸손은 물론, 책을 읽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정치거물 기업인 종교인들의 무리한 세습은 민주국가의 원리에 반하고 보수 전체를 욕 먹이는 일이므로 삼가야 한다는 부분도 있다.
그런 반성과 다짐은 밀려난 측도 마찬가지다. 정권을 잃은 범여권의 사람들은 5년 전 패배한 한나라당의 전례를 살피면서 물갈이와 자기개혁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씨가 친노진영의 처지를 '폐족(廢族ㆍ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된 후손)'이라고 표현한 것은 참 적절하다. 그는 "우리는 우리 모두의 변화와 개혁에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민주개혁세력'의 사분오열과 지리멸렬에 대한 뼈아픈 고백이다.
민주개혁세력이라는 자부 또는 어거지는 이번에 먹혀들지 않았다. 대통합민주신당이 자체 분석하듯 평화와 민주 등 이미 성취된 가치를 주창하면서 도덕적 우월감에 바탕을 둔 계몽의 정치를 한 것은 잘못이었다. 민주·평화·개혁을 기본 가치로 하되, 실용과 중도를 전략가치로 삼아 국민의 뜻을 읽는 정치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17대 대선을 계기로 좌든 우든, 보수든 진보든 앞으로는 꽤 달라지리라는 전망을 하게 된다. 서로를 가리켜 이른바 좌빨(좌익빨갱이)과 우꼴(우익꼴통)이라고 비난하는 대립은 계속되겠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은 같아졌다. 그 공통된 인식의 중요한 내용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겸손과 공부는 근본적으로 소통을 위한 자세이자 수단이다. 역사나 시대와의 소통, 동시대인들과의 소통, 반대편과의 소통 이런 모든 것에 해당된다. 겸손한 소통은 결국 관용의 자세일 수 있으며, 이런 관용이 확산되면 사회는 통합의 길을 지향할 수 있게 된다.
■ '좌빨'과 '우꼴'의 새로운 경쟁
우리나라의 경우 좌와 우의 싸움은 품성과 태도에 의해 불필요하게 증폭된 측면이 있다. 겸손, 보편타당, 온유, 품위…이런 것들이 이제 주요 덕목이 돼야 한다. 맞는 말이라도 싸가지 없이 하기보다 틀린 말이라도 싸가지 있게 하는 게 더 중요해진 상황이다.
보수쪽 사람들은 '잃어버린 10년'을 송두리째 없애 버리고 싶겠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으며 지워지는 역사도 아니다. 그 10년에도 역사적 필연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반정'이 응징이나 배제ㆍ척결로 이어지면 안 된다. 새로운 경쟁이 이제 새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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