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포장된 도로 위로 걷기를 권한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여행가이드북 <론리플래닛(lonely planet)> 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편에는 이런 경고문이 굵은 글씨로 박혀있다. 유고내전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발칸반도는 아물지 못한 상처처럼 곳곳에 대인지뢰를 품고 있다. 3일 개봉하는 <그르바비차> 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제거되지 못한 지뢰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르바비차> 론리플래닛(lonely>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의 한 마을 그르바비차. 열두 살의 사라(루나 미조빅)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전쟁기간, 그의 아버지는 “끝까지 참호를 떠나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했다. 세상이 아버지를 ‘순교자’로 우러르기 때문에, 어머니와 둘이 살면서도 기죽지 않는다. 적어도 수학여행을 가기 전까지는, 사라는 그 얘기를 사실로만 알았다.
귀여운 사라를 보는 낙에 힘든 인생을 견디는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는 딸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 비밀을 밝히지만, 그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즐겁게 베개싸움을 하다가 사라 밑에 깔리는 순간, 에스마는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사라의 뺨을 때린다. 전쟁 기간 세르비아군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2만명의 여성 속에 에스마도 있었던 것이다.
수학여행비를 면제받기 위해 사라는 엄마에게 아버지의 전사증명서를 요구하고, 에스마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밤마다 술집으로 출근한다. 200유로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보다, 자꾸 아버지의 존재를 묻는 사라가 에스마를 힘들게 한다. “아빠랑 어디가 닮았냐”고 묻는 사라에게, 에스마는 한참을 더듬거린 다음에야 “머리카락 색깔”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결국, “넌 강간범의 씨앗이야”라는 말을 딸에게 내뱉고 만다.
지극히 신파적인 스토리일 수 있지만 영화는 전혀 텁텁하지 않다. 기교와 감정을 극도로 절제한 감독의 연출력이 첫번째 이유고, 보스니아인의 기억에 생생히 남은 아픔을 진솔하게 담아 낸 담백함이 두 번째 이유다. 영화는 전쟁의 흔적을 들춰내 고발하려는 ‘의식’보다, 그 속에 내동댕이쳐졌던 사람들의 ‘현재’를 담담히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심리치료를 위해 공동체에 모인 강간 피해 여성들의 모습을 무심히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 천천히 비춰지는 얼굴들은 크게 동요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한 무표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망각의 영역 속으로 침잠하는 전쟁의 아픔을, 관객의 시선으로 붙잡아 보길 조용히 권한다. 2006년 베를린영화제는 보스니아의 신인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31)의 이 데뷔작에 황금곰상을 안겼다. 15세 관람가.
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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