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병원 현관을 힘겹게 걸어 들어온다. 아니 바람에 실려온다는 표현이 맞을 듯, 몸무게가 40㎏밖에 나가지 않는 남자의 걸음걸이에서 무게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많지 않은 머리카락마저 하얗게 새버려 60대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설(舌)암으로 혀와 입 바닥, 턱뼈까지 잘라낸 최종형(46)씨다.
최씨는 올해 2월, 알코올 중독과 간 질환으로 정기검진을 다니던 영월의료원에서 “혀에 암이 생겼는데 암 덩어리가 턱뼈까지 파고든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희망이 없었으니 절망할 것조차 없었다”면서 “치료를 포기한 채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따라 죽으려고 했다”고 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 신세에 암 4기라니. 자포자기하던 그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아들(16)과 딸(14) 덕분이었다. 갓난쟁이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재미가 쏠쏠하던 15년 전 최씨는 돈을 벌겠다고 정선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다행히 건설 현장 일이 끊이지 않아 ‘고향에 집과 땅을 마련해 농사를 지으며 알콩달콩 살겠다’는 그의 꿈은 조금씩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꿈은 2년도 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일이 바빠 집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들르기도 어려웠고, 그 사이 다른 가정을 꾸린 아내는 둘째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집을 나갔다.
노모의 연락을 받고 정선으로 되돌아온 최씨는 낮에는 남의 농사를 거들고, 밤에는 술에 절어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능력이 없어 아내가 집을 나갔으니 아이들이 모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것도 온전히 자신의 책임인 양 마음을 짓누른다.
오죽하면 다른 부모처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지 못한 속 쓰린 심정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그는 더욱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는 5년 후까지 만이라도 곁에서 챙겨주고 싶었다.
살고자 하니 길이 보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최씨를 설득하던 박종옥 영월의료원 외과과장이 삼성서울병원 사회사업실을 연결해주었고, 사회사업실은 외부 단체의 도움으로 수술비를 마련했다.
삼성서울병원은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를 무료로 제공했다. 여러 기관이 최씨를 살리기 위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결과 지난 8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입안 가득한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동시에 오른쪽 비골(종아리뼈 바깥쪽의 퇴화된 뼈)로 턱뼈를, 종아리 근육으로 혀와 입 바닥을 만드는 대수술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끝났다.
27일 환자들 진찰한 안용찬 삼성서울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는 “수술 후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 투여를 동시에 실시해 암에 쓸 수 있는 무기는 다 썼다”면서 “현재 상태는 양호하고 1~2년 내 재발이 없다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말이 어눌한 아버지의 통역이자 지팡이를 자처해 따라 나섰던 아들은 “건강 상태가 좋다”는 말을 듣자 그제야 웃음기가 돈다.
인터뷰 내내 ‘뚱’하던 아들은 신이 나는지 아버지의 손을 슬며시 잡는다.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몇 달 전 좋아하던 펜싱도 그만둔 아들의 소원은 다시 펜싱 선수가 되는 것도, 공부를 잘하는 것도, 풍족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냥 곁에 계시기만 해도 좋겠다. 오랜만에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아버지는 또 걱정이 태산이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얻었지만 지은 지 30년이 지나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 한 달에 한두번 병원을 오가는 차비를 비롯해 전기요금, 전화비, 상수도 요금 등 매달 기초생활수급 지원금 60여만 원으로는 항상 빠듯한 생활이 이제는 암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한다.
*최종형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분은 삼성서울병원 한대흥 사회복지사(02-3410-6141)에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k.co.kr
■ "다른 신약들 써보고 싶어도…건보 적용안돼 너무 비싸요"
지난 11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임의비급여 개선안에 대해 암 환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번 대책이 그간 불법적으로 사용하던 임의비급여 항암제를 합법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일 뿐 비용을 절감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복지부가 마련한 개선안은 보험이 적용되는 약제가 있는데도 허가 받지 않은 다른 약제(대부분 신약)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유서를 제출하면 합법적 비급여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다.
김준현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복지부가 말하는 ‘의학적 근거’라는 것이 ‘무작위 대조군 시험에 준하는 체계적 문헌 고찰’로 매우 높은 수준의 연구를 말한다”라면서 “그 정도 수준의 의학적 근거가 있다면 지금 당장 건강보험을 적용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무작위 대조군 시험은 해당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중 치료제를 투여하는 군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을 임의로 선정해 두 군 사이의 차이점을 살피는 것이다.
보통 100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여러 대학병원이 연구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정도 연구결과가 있다면 해당 질환에 효과가 입증된 것이니 건강보험을 적용해 달라는 것이 환자들의 요구다.
양준호 복지부 보험약제팀 서기관은 “기존에는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항암제를 사용하려면 먼저 심평원에 사용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11일 발표한 대책 덕분에 사용 후 10일 이내에만 심평원에 승인을 요청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심평원의 승인은 병원이 합법적인 의료행위를 했다는 승인일 뿐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3년 전 대장암 3기로 진단받고 투병 중인 이모씨는 “현재 다른 항암제가 듣지 않아 새로 나온 표적치료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 달에 700만원이 넘는 약값을 부담하기 어려워 조만간 치료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면서 “본인 부담액을 조금이라도 줄여달라”고 하소연했다.
암 환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복지부는 “승인 신청을 1년 단위로 집계해 효과가 입증되고 환자들이 널리 사용해야 하는 항암제는 급여 전환을 검토할 계획이다”라고 밝혔으나 환자들은 “생명이 위급한데 1년을 기다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이번 대책으로 제약사와 의료계만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했다.
제약사가 의사에게 “외국의 연구자료를 취합해 의학적 근거를 제시할 테니 무조건 자기 회사의 항암제를 처방해달라”며 유혹을 손길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제약사들이 이번 대책의 허점을 이용해 돈벌이에 나설 것이 뻔하다”며 “정부는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암 치료 건강식품' 효과 없어
본보는 샘안양병원 보완의학 암연구소 김태식 소장팀과 공동으로 암 치료 효과가 있는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검증작업을 10월부터 벌였습니다.
‘우리가 제조 판매하고 있는 건강기능식품이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광고하고 있는 몇몇 업체에서 수십 차례 연락을 해왔으나,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단 한 건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태식 소장은 “효과가 있으면 판매와 홍보에 도움을 주겠다고 밝혔음에도 자료를 제출하지 못한 것은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을 업체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알려왔습니다.
김 소장은 더불어 “건강기능식품을 꼭 먹어야겠다면 식품으로 허가를 받은 제품 중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주치의와 상담 후 복용해야 한다”고 환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 속설의 허와 실
소아암도 조기발견이 최선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조기 발견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소아암은 특성상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발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소아암은 조혈모기관, 신경계, 뼈, 근육 등 세포가 급속히 분열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돌연변이 세포가 빠르게 암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죠.
초기에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어 혹이나 반점 등 증상이 외부로 나타나고서야 병원을 찾습니다.
소아암 환자의 80%가 4기에 진단받는다는 통계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4기에 발견한 소아암이라 해도 성인암보다 약물치료에 잘 반응하는 덕에 소아암 환자 대부분이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문의 국가암정보센터(1577-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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