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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임정순, 그 녀석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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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임정순, 그 녀석 길들이기

입력
2008.01.02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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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 길들이기

임정순

그 녀석이다. 가로등 아래 어스름한 거리에 겁에 질린 녀석이 서 있다.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는 것이 분명 얼어있다는 증거다.

'그냥 달려! 달리란 말이야.'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녀석은 수북이 쌓여있는 쓰레기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들고 있는 까만 봉지가 바르르 흔들린다. 나는 쓰레기 더미에 납작하게 엎드려 녀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평소 같으면 앞발을 세우고 달려가 녀석을 소스라치게 만들어 달리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녀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녀석은 가지 않는다. 몸이 배배 꼬인다. 나는 발톱을 세우기도 하고 오므리기도 했다. 혓바닥을 내밀어 털도 핥았다. 녀석은 참 질기다. 무언가를 찾는 듯 눈동자만 굴린다.

하늘에는 조각달이 걸려있다. 구름에 반쯤 걸린 달이 구름 속에 숨어 깔깔거리듯 내려다보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부시럭 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제야 녀석은 "으아"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녀석의 손에서 까만 봉지가 이리저리 춤을 춘다.

'쯧쯧쯧, 저렇게 겁이 많아서야!'

나는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녀석은 나와 너무 닮았다.

내가 처음으로 녀석을 만난 것은 동네 놀이터에서였다.

그날은 흐리고 안개가 잔뜩 낀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유난히 몸이 편하지 않다. 보통 때라면 잠잘 시간이지만 잠조차 오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놀이터를 거닐었다. 안개에 싸인 놀이터는 환상적이면서도 신비스러웠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누그러져서 미끄럼틀 아래에 몸을 뉘였다. 잠시 눈을 붙였을 때였다.

"야, 왜 이것밖에 없어?"

덩치 큰 몇 명의 아이들이 가운데 한 아이를 몰아넣고 이리저리 밀며 다그치고 있었다. 가운데 있던 아이가 바로 그 녀석이다. 녀석은 이리 저리 밀렸다.

"미안해!"

"이걸로 뭐해. 껌 값도 안 되겠다. 더 가져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한 아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도 발길질을 했다.

"더 가져오란 말이야! 더! 더! 더!"

"어 없어. 없단 말이야!"

녀석이 말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몸에 있던 털이 곤두섰다. 그때 그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눈이었다.

어차피 잠은 다 달아났다. 나는 빠르게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몸을 날렸다. 여러 명의 아이들은 느닷없는 공격에 놀라 자빠졌다. 발톱으로 한 아이의 얼굴을 정통으로 긁었다.

"앗!"

덩치 큰 아이가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발톱을 세웠다. 다른 아이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가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 넘어졌다. 나머지 두 명은 넋이 나간 듯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잽싸게 놀이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달려가 지켜보았다. 넘어져 있던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일어나더니 가운데 있던 녀석을 몰아붙였다.

"저 고양이 누구야? 너희 집 고양이야?"

아이들은 나한테 못한 화풀이를 녀석에게 했다. 녀석은 옴팡지게 얻어맞으면서도 한번도 대거리를 못했다.

'일어서! 일어서란 말이야.'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 후로 몇 번 놀이터에서 녀석을 만났다. 그때마다 녀석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녀석에게는 내 모습이 묻어있었다. 용기가 없어서 대항하지 못했던 비겁했던 시절의 내 모습!

엄마를 잃고 나는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찾아놓은 은신처마다 힘센 고양이들에게 빼앗겼다. 한 겨울에도 쫓겨나기 일쑤였다. 자동차 밑에 눈을 붙이고 있으면 금세 눈이 녹아 질퍽거렸다. 물이 묻으면 소름끼칠 만큼 불쾌하고 기분 나빴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헤매 다녔다. 조그만 새끼 고양이들조차 함부로 업신여겼다.

"덩치 값도 못하니?"

엄마 고양이들은 자기 새끼를 품에 안으며 빈정거렸다. 그때마다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고양이들에게 쫓겨다니다보니 자꾸만 지쳐갔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기운도 없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할퀴고 물어뜯어도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저항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쓰러졌다.

따뜻한 기운에 눈을 떠 보니 털보 고양이가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솜뭉치처럼 몽글거리는 털이 많은 할아버지 고양이였다. 털보 고양이는 생선토막을 나누어주며 말했다.

"내 삶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러라.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 이곳은 내가 그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곳이다."

"전 지킬 힘이 없어요. 할아버지가 떠나면 금방 빼앗기고 말거에요."

"너도 할 수 있어. 너에게는 스스로 지킬 힘이 있단 말이다."

"아니에요. 이제껏 얻어맞기만 한 걸요."

"그렇다면 이 곳을 너에게 줄 수가 없구나. 내가 살던 곳을 지킬 힘도 없는 너 같은 약골에게는 말이야."

"맞아요. 전 약골이에요. 자신의 몸도 지키지 못하는."

이상하게 울음이 터졌다. 엄마를 잃고도 한번 울어 본적이 없었다. 길에서 걷어차이고 물어 뜯겨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고양이들의 냉담하고 차가운 눈동자들을 보면 주눅부터 들었다. 며칠을 굶어 간신히 구한 먹이를 눈앞에서 빼앗기고도 얻어맞을 까봐 도망갔다. 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나날들이었다. 나는 털보 고양이 품에서 마음껏 울었다. 털보 고양이가 혀로 핥아주며 말했다.

"맞서야 해.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어. 저항은 아름다운 거야."

"저항이라고요?"

그 말에는 힘이 있었다.

털보 고양이는 자신만의 비법이라며 하나를 가르쳐주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공격을 하면 내 힘의 몇 배를 발휘할 수 있어. 그럴 때 집중해야할 것은 공략할 목표물이야. 몇 번 그렇게 힘을 보이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털보 고양이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의 자세와 표정을 보여주었다. 연습할 때는 평소의 인자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빛이 오싹한 게 오금이 저렸다.

"눈빛도 한 몫을 한단다. 눈에 힘을 주면 상대방은 움찔거리게 돼 있거든."

털보 고양이는 기운이 없어 오랫동안 가르쳐주지는 못했다. 함께 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털보 고양이가 남긴 말은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맞서야 해! 맞서서 저항하는 것이 고양이를 가장 고양이답게 만들어!"

"저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털보 고양이가 몇 번 흠흠 거리며 말했다.

"너를 보면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르거든. 나도 참 힘든 세월을 보냈지."

털보 고양이의 안식처가 지금 나의 안식처다. 이제는 더 이상 쫓겨 다니지도, 물어 뜯기지도 않는다. 털보 고양이는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었다.

'그래. 녀석을 한번 길들여 봐?'

그때부터 녀석 주변을 맴돌았다.

녀석이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쯤 뒤를 졸졸 쫓아갔다.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게 걸어갔다. 그러다 뭔가 이상했는지 뒤돌아보았다. 그러면 나도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녀석은 겁에 질려 한참을 노려보다 도망쳤다.

다음 날은 녀석이 더 빨리 뛰었다. 밤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쓰레기봉투를 모아놓는 곳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녀석은 내가 나타나자마자 도망쳤다. 가끔 아주 가끔은 녀석이 나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녀석에게 좀 더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기로 했다. 먼저 다리 힘을 기르는 거였다. 나는 녀석이 도망갈 때 더 빨리 뛰어갔다. 녀석을 물어뜯는다는 심정으로. 하루는 녀석이 얼마나 놀랐던지 실내화 가방까지 팽개치고 도망쳤다.

'겁쟁이 같은 녀석!'

그럴 때면 나도 기운이 빠진다. 실내화 가방 속에서 녀석의 체취가 느껴졌다. 나는 실내화 가방을 녀석의 집 앞에 두고 왔다.

다음 날 녀석의 손에 실내화 가방이 들려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녀석은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가끔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나도 더 이상 쫓아가지 않았다. 녀석이 집으로 들어가 창문을 빠끔 열고 쳐다보았다. 녀석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녀석이 소시지 하나를 던져주었다.

'얻어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성의를 생각해 소시지를 물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가 있다는 것은 안 거야!'

다음 작전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미끄럼틀 위에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나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머뭇거렸다. 나는 모래위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유유히 놀이터를 빠져나가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겼다. 녀석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이들이 막 발길질을 시작하려고 다리를 든 사이 녀석이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황당했던지 소리치며 쫓아갔다.

"야, 거기 서! 거기 안 서!"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아이들이 헉헉거렸다. 나는 어느새 녀석의 뒤를 쫓았다.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 씩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크게 야옹 소리를 내며 칭찬을 해 주었다. 녀석이 창문을 열고 소시지를 주었다. 내가 녀석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고 녀석이 나를 길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소시지를 물었다.

다음 날, 공기는 험악했다. 습도가 높아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움직이기가 싫다. 녀석에게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루만 가지 말까?'

오랫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털보 고양이 생각이 나서 억지로 힘을 냈다.

아이들이 녀석을 데리고 우르르 놀이터로 몰려가고 있다. 나도 따라갔다. 아이들은 어느새 내가 자신들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나의 존재만 알리기로 했다. 미끄럼틀에서 뛰어내려 겁을 준 다음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걸으려고 막 발을 내디디는 순간,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물은 더 옭아맸다.

"잡았다!"

한 아이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나는 그물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아이가 놀란 듯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물에 휘감긴 채 펄쩍 뛰었다. 아이들이 놀라 흩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물 속에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안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발을 높이 들었다. 한 아이가 걷어차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저항은 고양이를 가장 고양이답게 만들어! 맞서!"

털보 고양이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으르릉 거렸지만 이미 내 다리는 그물에 꽁꽁 묶인 뒤였다. 나는 도움을 청하려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겁에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아이들의 발길질이 더 거칠어졌다. 이를 악물며 참았지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해!"

녀석이 울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실실 웃었다.

"그만하란 말이야. 제발!"

녀석이 애원했지만 아이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나는 점점 힘이 빠졌다.

그때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녀석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아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 녀석의 눈빛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 털보 고양이에게서 봤던 것처럼 차가우면서 날이 선 눈빛이었다. 그러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더니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녀석이 막대기를 던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녀석이 울면서 그물을 풀어주었다. 이리저리 얽힌 그물을 풀기란 쉽지 않았다. 녀석의 눈물이 욱신거리는 내 몸으로 떨어졌다.

그날 밤 녀석은 자기 방에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며칠동안 그 집에 머물렀다. 녀석은 원하면 언제든지 나가라고 창문도 열어두었다.

조각달이 어느새 보름달이 되었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잡힐 듯한 달 속에서 털보 고양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내 집이 있었지!'

나는 자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살살 핥았다. 녀석이 빙그레 웃는다.

'이제 알았지? 네 안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녀석은 알아듣겠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는 열린 창문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마당에서 녀석의 방을 쳐다보았다. 빙그레 웃던 녀석이 생각나자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두운 골목길에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나는 오랜만에 그 길을 신나게 달렸다.

▦당선자 임정순씨 "작품속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느낌"

2000년 10월30일. 임정순(37)씨는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만 서른 살이 된 그 해, 임씨는 10년을 다니던 광고 회사를 미련없이 그만뒀다. 곧바로 퇴직 전 따둔 독서지도사 자격증으로 일을 구하고 동화 창작 공부에 돌입했다. 그렇게 시작된 30대가 다 가기 전에 신춘문예의 높은 문턱을 넘었으니 성공적인 인생 유턴이다.

삶의 핸들을 꺾은 이유에 대해 임씨는 “계속 직장생활에 매몰돼 있으면 내가 없을 것이란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말 원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던 그는 10대 시절의 문재(文才)를 기억해냈다. 학교 백일장에 나가면 으레 상을 받으면서도 나약함의 징표인 것만 같이 여겨지던 글재주. 당시 임씨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과 ‘여자다움’이라 불리는 것들이 너무 싫었다.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것도 이런 심리와 무관치 않았다.

생의 한 고비를 넘어 다시 만난 문학은 든든했다. “삶의 환멸을 드러내기보단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좋아서” 동화를 택했다는 임씨는 습작을 할수록 자신이 작품 속 아이들과 함께 자란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직업 특성상 아이들을 자주 만나는 그는 최근 심리상담을 공부하면서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예전엔 경험 없이 관념에 기대 꾸며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내용의 진정성이나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적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상처가 있음을 깨달으면서 내 동화도 달라진 것 같다.”

활달한 성격의 임씨는 ‘기(氣)’ ‘에너지’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외부적 힘이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기의 원천은 울릉도라고 했다. 서울 출신인 그가 수산물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곳에 계신다. 임씨는 앞으로 쓰게 될 동화가 독자에게 ‘울릉도’가 되길 바랐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작품을 쓰고 싶다. 상처를 방치하면 결국 외부로 돌출돼 주변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만다. 판타지를 쓴다면 우리 고유의 민속을 소재로 하고 싶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당선소감 "글이 따뜻한 손길임을 새삼 깨달아"

시간이 지나면 그냥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 속에는 아직도 힘없고 작은 어린아이가 있다는 걸. 그때부터였습니다. 글은 저에게 위로가 되고 따뜻한 손길이 되어주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참으로 많은 길을 돌아왔습니다. 때로는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 손을 놓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내 안의 아이였습니다. 이제는 내 안의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처음 듣던 날,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물어보았습니다. 너무 벅차고 가슴 떨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서야 저에게 지워진 커다란 무게를 느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더 많습니다. 갑자기 두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해 봅니다.

이 길을 걸어오기까지 그리고 내 안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많은 분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동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 강정규 선생님,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지도해주셨던 선생님들, 연필소리 글벗 친구들, 단아 언니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지켜봐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 친구들 모두 오늘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한국일보사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임정순(任貞淳)

1970년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현재 한우리독서지도사

▦심사평 "인상적 캐릭터·매력적 서사에 초점"

수많은 응모 작품 중에서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으로 오른 것은 5편이다. 응모 규정에 맞지 않는 장편은 그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외할 수밖에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이 안정되어 있는지 그리고 상식적인 교훈을 넘어 문학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여부를 고려한 결과였다.

대부분의 응모 작품들이 단편적인 일상의 삽화에 머물고 있었기에, 동화만이 내세울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은유로서의 상상력이 아쉬웠다. 고만고만한 생활이야기를 가지고서는 동화작가로서의 솜씨를 한껏 발휘하기 힘들다. 특히 어린이들이 읽는 작품에서는 인상적인 캐릭터와 매력적인 서사를 지닌 흥미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김수경의 <도토리 키재기> , 김현주의 <할머니 마음과 엄마 마음> , 이기규의 <호랑이 택시> , 임정순의 <그 녀석 길들이기> , 조수빈의 <여신루리> 등 5편은 쉽게 잘 읽히는 문장과 얘깃거리가 될 만한 흥미로운 사건을 지닌 것들이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인물의 행동?사건의 전개에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약점들이 조금씩 노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가장 치밀한 짜임과 서사를 보인 <그 녀석 길들이기> 가 눈길을 끌었다.

고양이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긴장감을 주는 힘 있는 서사 전개가 장점이었다. 고양이의 행동이 생태적으로 약간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보아 무방한 정도라고 여겨졌다.

또한 폭력과 저항과 평화의 문제를 둘러싼 이 작품의 테마와 관련해서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는 구절도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식을 깨는 발상의 참신함을 높이 사줄 만했다. 심사자들은 이 작가의 가능성 쪽에 더 무게를 실어주는 데 기쁘게 합의했다. 심사위원=노경실(동화작가ㆍ소설가) 원종찬(아동문학평론가ㆍ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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