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중순. 프랑스 파리 출장을 준비하던 차에 교통공무원 노조의 총파업 계획 소식을 접했다. 난감했다. 대중 교통수단이 올스톱하면 현지에서 취재할 때 뭘 타고 이동하지? 하지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바뀌어있었다. 총파업 무산. 20년간 거의 한번도 정부에 패한 적이 없던 프랑스 교통공무원 노조인데, 파업이 실패하다니!
확실히 뜻밖이었다. 지난 10월의 1차 총파업만해도 철도 전기 등 공공노조에 교사와 판검사 노조까지 가세, 약 30만명(노조통계)이 시위에 참여했다.
파업의 타깃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특별연금개혁. 특별연금이란 철도 지하철 등 특수직 공무원에게 지급되는 연금으로, 민간보다 월등한 조건이다.(우리나라 공무원 연금처럼!) 이런 특혜를 받는 노동자는 110만명, 연금지출은 연 50억유로에 달한다. 프랑스 재정적자의 단연 최고 주범이다. 1995년에도 프랑스 정부는 특별연금을 민간수준으로 낮추려고 했지만, 무려 5주간이나 지속된 공무원 파업에 굴복하고 말았다.
사실 프랑스 사람들은 파업에 대해 온정적이다. 교통파업으로 발이 묶여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오히려 낭만적이잖아”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10월 총파업이후 이례적으로 파업반대 시민시위가 이어졌다.“2%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 8%에 달하는 실업률에 특혜를 받고 있는 공무원들이 무슨 파업이란 말인가.” 정체된 경제가 시민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등돌린 여론 앞에서 결국 노조는 12월 총파업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선‘변화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지난 20년간 개혁이란 걸 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자크 아탈리 교수(프랑스 성장촉진위원회 위원장)의 진단 그대로다. 파리에서 근무중인 한 국내 주재원은 “프랑스에는 카페조차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카페에서 책 읽으며 커피를 즐길 만큼 사회분위기가 한가롭지 않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변화하는 프랑스의 중심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있다. 모델 출신 연인과 버젓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생활도 파격적이지만, 그의 개혁행보는 훨씬 더 혁신적이다. 낮은 성장, 높은 실업,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 등 오랜‘프랑스병’을 치유하기 위해, 그는 지금 경제를 총체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
사르코지의 개혁은 크게 두 갈래다. 우선 재정 건전화를 위해 공공영역을 축소하는 것. 프랑스 정부는 이를 위해 특별연금개혁과 함께 공무원 감축을 추진중이다. 중앙정부부처와 위원회를 절반으로 축소하고, 향후 5년간 10만명의 공무원을 감축한다는 구상이다.
교사 병원근로자 등을 포함한 프랑스 공무원은 미테랑 행정부 이후 실업대책 차원에서 크게 확대돼 현재 약 51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규모.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무원을 줄이면 연 10억유로 수준인 공공행정 서비스비용이 8억5,000만유로로 감축돼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르코지 개혁의 제2항은‘더 일하고 더 벌자’는 경쟁정신의 도입. 프랑스에서는 주 35시간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하면 기업에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일요일 근무도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또 퇴직 전 3년 평균연봉의 85% 정도를 연금으로 평생 받을 수 있고, 한번 고용되면 거의 해고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더 일할수록 불이익을 주는 이상한 나라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를 더 일할수록 혜택을 주는 시스템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가 입안한 ‘노동, 고용, 구매력에 관한 법안’에 따르면 올해부터는 주 35시간 법정 근로시간을 넘기는 경우 시간외 근로수당과세가 면제되고, 초과 근로수당에 대한 사회보장세도 면세된다. 일요일 근무도 노사가 협의해 가능하도록 했다.
기업정책도‘경쟁’형으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한 산업군에서 하나의 대기업을 독점적으로 키우는 소위‘내셔널 챔피언’정책을 고수해왔다. 국가적 지원을 통해 간판대기업을 키우고, 이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을 국내에서‘분배’하는 경제방식이다. 에어버스로 유명한 EADS(우주항공)나 토탈그룹(석유), 최근 프랑스가스공사와 합병된 스웨즈그룹(에너지) 등이 대표적인 ‘내셔널 챔피언’이다.
하지만 경쟁부재는 결국 경쟁력저하로 이어졌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와 관련,‘클러스터’란 중소기업 육성책을 통해 대기업 위주의 기업환경에 메스를 가하고 있다. 클러스터는 지역과 중소기업, 대학을 잇는‘산업생태계’를 조성해 새로운 고용까지 창출한다는 구상. 현재 지역별로 바이오 종이 등 60여 테마 클러스터가 시험 조성되고 있다.
사르코지 노선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는 지난 5월 대통령 당선 이래 최근까지도 60%를 웃돌았다. 경제시스템에 대한 개혁 외에도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인사, 국익을 위해서라면 적과도 기꺼이 악수를 하는 실리외교 등 특유의 ‘실용주의’로 국민적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득갑 연구원은“정부의 개입과 복지를 중요시하는 프랑스의 기본가치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 전통을 제외한 영역에서 과감한 효율을 추구하는 프랑스식 제3의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 파리12대학 제라르 뒤센 경제학 교수
언뜻 보면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적 가치를 벗어버린 것 같다. 대신 영미식 의복(신자유주의)을 착용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사회주의-자본주의 체제전환 연구 권위자인 파리12대학 경제학과 제라르 뒤센(61ㆍ사진) 교수는 이에 대해"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개혁은 결코 영미식 개혁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는 최근 공개된'아탈리 보고서'를 언급했다. 이 보고서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자크 아탈리 박사가 이끄는 프랑스 성장촉진위원회에 의뢰한 프랑스 체제개혁을 위한'긴급처방전'성격을 띠고 있는데, ▦유통개혁 ▦중소기업 육성 ▦도시정책 재검토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뒤센 교수는"아탈리 보고서의 구체 내용을 보면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통개혁은 대형 유통업을 활성화해 구매력 저하를 해결한다는 것. 지금까지는 소규모 자영업자 보호를 위해 대형마트를 강하게 규제해왔으나, 이젠 규제를 풀고 판매가격이나 운영시간 등을 경쟁시키겠다는 내용이다. 둘째 중소기업 육성은 소규모 기업까지 설립규제를 풀어 프랑스 산업구조에 역동성을 불어 넣겠다는 것. 단지 중소기업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부터 소기업까지 아우르는 산업생태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시정책 재검토는 프랑스의 모순이 집적된 도시 변두리에 인간적인 건축물과 문화를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뒤센 교수는 "영미식 모델은 사기업이나 개인이 개별적으로 변화를 추구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공공적 개념이 많다"며"아탈리 보고서의 제안 역시 공권력의 개입을 통해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프랑스적 믿음에 바탕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노선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여전히'프랑스적'이란 얘기다.
다만 사르코지 대통령이 과거 지도자들과 다른 점은 훨씬 더 실용적이란 점이다. 뒤센 교수는 특히 사르코지의 인사정책을 극찬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개인의 당파성은 타고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남쪽 프로방스출신은 좌익, 북쪽 알자스 출신은 우익이 많다. 그런데 사르코지는 인사정책을 통해 이 오랜 좌ㆍ우대립을 깨고 있다"고 평가했다.
뒤센 교수는 "이젠 극단적 좌ㆍ우 세력을 배제하고 중도세력끼리 방법론적 논쟁을 벌어야 한다"면서 좌ㆍ우 중도세력이 함께 추구할 가치로'이성과 현실에 기반을 둔 건전한 국가경영'을 강조했다. 그는 "시장은 효율적 도구지만 절대 전능하지는 않다는 사상적 바탕에서 경쟁정신을 도입하자는 것이 프랑스적 제3의 길"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선 사르코지 개혁이'탈이념적 실용노선'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이념통합적 실용주의다.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좌파에 대한 우파의 승리'로 해석되고 있지만, 한국적 스펙트럼상 프랑스는 여전히 좌파적인 셈이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 유럽은 지금 '경제 리모델링중'
유럽은 지금 수술중이다. 병명은 성장정체증. 오랜 과잉복지와 경쟁부재로 인해 성장세포가 죽어버린 것이다.
메스의 날은 날카롭다. 과도한 복지를 축소하고, 비대해진 정부와 공공부문을 감축한다. 아울러 경쟁을 통해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 일하는 사람 중에서도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차별화한다. 즉 파이 배급량을 줄이고 더욱이 차등 배분토록 함으로써,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유발시켜 결국 파이생산량을 늘려간다는 전략이다.
수술을 선택한 것은 국민들이었다. 최근 1~2년 사이 선거를 통해 도미노식으로 우파(혹은 중도우파) 정권이 집권했다. 프랑스가 그렇고, 스웨덴이 그렇고, 독일이 그렇다. 국민이 우파 정부를 선택했다는 것은 스스로가 분에 넘치는 복지를 반납하고, 가혹한 경쟁시스템으로의 편입을 자원했다는 의미다. 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제자리 걸음이나 다름없는 성장률. 두자릿 수를 넘나드는 실업률. 늘어나는 노인과 빈둥대는 젊은 층.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파업.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 가정경제로 친다면 이미 오래 전에 파산했어야 옳다. 뒤늦게 나마 사라진 성장DNA를 복원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분주해졌다.
스벤 호르트 스웨덴 스톡홀름남대학 교수는 “경제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복지와 분배는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며 “세계화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기존 시스템을 폐기하는 것은 아니다. 분배를 버리고 성장일변도로 가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 작은 정부나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성장ㆍ분배의 균형, 정부개입과 시장자율의 균형에 대한 모색이다. 보다 생산적인, 보다 효율적인 경제를 위해 시스템을 ‘리모델링’하는 실용주의 노선인 것이다.
최근 유럽의 실용주의 실험은 종래의 좌ㆍ우 통념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더욱 특징적이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개혁도 사실은 사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비전을 이어받은 것이고,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전ㆍ현 총리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대처리즘’의 연장선상에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강력한 개혁 조치나, 프레드릭 레인펠트 스웨덴 총리의 복지모델 대수술도 ‘인사탕평책’(프랑스) ‘정책공조’(스웨덴) 등을 통한 ‘좌파 끌어안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다. 미카엘 브루다 독일 훔버트대학 교수는 “만약 성장이 복지와 분배를 견인하지 못하고 양극화를 조장한다면, 언제든 여론은 다시 돌아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새로 출범할 ‘이명박정부’도 실용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그 출발은 좌ㆍ우의 경계를 넘어 효율적이면서도 균형잡힌 경제로 시스템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신년을 맞아 한국일보는 ‘이명박정부’에 좋은 참고서가 될 유럽각국의 경제개혁 실험을 소개한다.
베를린ㆍ스톡홀름=이영태기자 ytlee@hk.co.kr파리ㆍ런던=문준모기자 moom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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